원문정보
초록
영어
A Seon master Sa-myeong Yujeong(1544-1610), he lived during the middle of the Joseon Dynasty, a period which endured the Japanese Invasion, and became a national hero during it. This study is based on records such as Sa-myeong-daesa-jip and Bun-chung-seo-nanrok. I followed his life as a monk, studying the process of enlightenment, performance and enlightenment. He was one of the leading disciples of Master Seosan Hyujeong(1520-1604). Sa-myeong was born in Miryang City of Gyeongsangbuk-do Province. After the deaths of his mother in 1558 and his father the following year, he became a monk at Jikji-sa Temple in Gimcheon City. Early in his career as a monk, he studied both Buddhist and Confucian texts and he communicated with Confucian scholars. In 1575, he was recommended for the leadership of the Seon Order, but refused and instead traveled to Mt. Myohyang-san. There he was accepted and instructed by preceptor Seosan. Together with his teacher, he organized and became a leader of the Buddhist monastic militia that defended the kingdom against the Japanese invaders. During and after the war he was appointed as a royal envoy and participated several times in peace negotiations with Japan; his successful trip there after hostilities ceased resulted in the return of many kidnapped prisoners. Sa-myeong was recognized for his remarkable patriotic services by the Joseon government and society at large. The king had a hermitage named Hongje-am Hermitage built right next to Haein-sa to serve as his retirement home and memorial. He remains an exemplar of patriotism, regarded as one of the greatest heroes of the hoguk-bulgyo(nation-protecting Buddhism) tradition. He continues to be remembered in modern times, with numerous statues and other memorials around Korea. His patriotism is not a practice of Confucian thought, it was the basic principle of Buddhist monks. The relief of regeneration is the way to practice mercy, there was a firm conviction that the guarding of the king was the guardian of the Buddha.
한국어
사문은 출가수행자로서 대승불교의 이상적인 수행자인 보살을 표방한다. 즉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자리이타 정신을 지향한다. 사명당은 “번뇌없는 학문을 배우기 위해” 출가하였다. 사명당대사집과 분충서난록 등의 기록을 토대로 사명당의 생애를 따라 사문으로서의 출가와 수학, 수행과 정진, 그리고 깨달음의 과정을 살펴보았다. 사명당은 임진왜란의 국난을 극복하는데 앞장 선 민족의 영웅이다. 조선중기 억불의 시대에서 승려의 신분으로 국가와 민족을 구하기 위해 의병으로 투신하여 수많은 전장을 누볐다. 7년간의 전쟁이 끝난 후에도 산성 축성과 궁궐 공사 등 국가의 부름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 결과 우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손꼽히고 있다. 그러나 사명당은 의승장 이전에 출가수행자였다. 16세에 출가하여 전쟁에 참여하는 49세까지 33년간 교학을 탁마하고 참선 수행에 전력하는 출가사문이었다. 일찍이 32세에 서산 휴정의 문하에 입실하여 조선중기 법맥을 계승하는 적통(嫡統)으로 인정받는 등 억불시대의 조선불교를 짊어질 동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명당에 대한 인식은 대부분 ‘의승장’, ‘구국의승’ 등으로만 국한되어 있다. 그의 구국의 업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사문으로서의 유정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우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사명당의 사문상을 출가 시절과 봉은사에서의 수학, 스승 서산의 가르침, 그리고 깨달음 직후의 불사 활동 등을 통해 살펴보았다. 이후 사명당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스승의 명에 따라 의승으로 투신한다. 1608년 병을 얻어 해인사로 은거하기까지 무려 17년 동안 전장을 누비고, 일본을 왕복하였으며 산성을 축조하였다. 이 오랜 세월 혁혁한 전공을 올리고, 피랍된 동포를 귀환시킨 결과, 사명당은 백성들에게 불가사의한 능력을 지닌 영웅으로 회자되었다. 조선사회의 주역을 자처했던 유자들도 사명당의 위대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명당은 출가 이래 한번도 사문임을 잊어 본 적이 없고, 창검을 들고 왜적을 물리치는 일은 중생구제의 방편이라는 믿음을 버린 적이 없었다. 즉 사명당은 의승장 이전에 출가 사문으로서의 본분사에 철저하였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의승들은 전쟁이 장기화되자 환속하는 일이 빈번하였고 심지어 의승장 출신들도 그러하였다. 그러나 사명당은 결코 흔들림 없이 구국의 선봉에 나아갔다. “여래가 세상에 나온 것은 원래 중생을 구호하기 위해서”라며 왜적을 물리치는 일이 곧 사문으로서 중생을 구제하는 길이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사명당의 구국활동은 유가적 충의사상의 발로가 아니라 사문의 본분사였고 하화중생의 실천이었다. 중생을 구호하는 일이 자비를 실천하는 길이고, 임금을 지키는 일이 부처님을 지키는 일이라는 출가수행자로서의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출가와 수학
Ⅲ. 승과 급제와 수행
Ⅳ. 스승 서산의 가르침
Ⅴ. 깨달음과 월정사 중건
Ⅵ.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