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영어
Bumsan, Kim Bup Rin (1899~1964) is one of the representative intellects in modern Buddhism. He was a swarajist during the Japanese rulling era and played as a pioneer of the Buddhist society after liberation. Such life of Kim Bup Rin can be divided into national movement and popular Buddhism movement areas. His national movement era is during his early and late adulthood (age 21~47), from his leading of independence movement on Mar. 1 in Beomeo Temple, independence movement in China and France to studying abroad in France until liberation. The popular Buddhism movement ear is during his late adulthood and senescence (age 30~47), in which he participated in the popular Buddhism movement for education and mission, national movement and the reality participation movement for Buddhist society after liberation (age 47~66). His national movement was aimed at overcoming the national condition under Japanese rulling. The popular Buddhism movement of Kim Bup Rin advocated the social corrective Buddhism under the motto of 'people-oriented Buddhism'. In this movement, he set the regular people as the target for the mission and regarded spreading common sense and eradicating illiteracy as an urgent agenda. He thought the pioneering activities of Youth Buddhism Association might led to the realization of new Buddhism movement and demanded their activities. He asserted that the most important issue in the popular Buddhism movement was pupularization and modernization of Buddhist scriptures. In terms of mission, Kim Bum Rin advocated the advance of Buddhism in the rural areas. He asserted that the farmers should be educated to eradicate illiteracy, which means raising people's capacity for independence. On the contrary his advocation of separation of religion and politics means he asserted the religious freedom and independence. Therefore, spreading Buddhism to the people to him implied the national movement for independence, which is the same vice versa.
한국어
범산(梵山) 김법린(金法麟, 1899~1964)은 근대불교의 대표적 지성 가운 데 한사람이다. 그는 일제치하에서는 독립 운동가였고, 해방이후에는 불 교계의 선구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이러한 김법린의 생애는 민족운 동과 대중 불교운동의 두 활동 영역으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다. 민족운동은 그의 청ㆍ장년기(21세~47세)로 범어사의 만세운동주도와 중국과 프랑스에서의 독립운동 그리고 프랑스유학 후 해방이 되기 전까 지이며, 대중불교운동은 장ㆍ노년기로 프랑스 유학에서 돌아온 후 해방 이전까지(30세~47세)의 교육과 포교를 위한 민중 불교운동과 민족운동 그리고 해방 후(47세~66세) 현실참여 불교운동의 시기이다. 그의 전반기 를 출가와 민족의 독립을 통한 자유 획득을 위한 과정이라고 본다면, 후 반기는 불교의 포교와 민족운동이 맞물려 적극적 사회참여를 통해 대중 불교를 추구하였다. 김법린의 민족운동은 당시 일제치하에서 먼저 민족이 처한 현실을 타 개하기 위한 운동이었다. 그는 범어사를 중심으로 하는 3.1운동을 주도 하고, 그 후 중국으로 건너가 국내와 연계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프랑스 유학중 벨기에 뷔르셀에서 열린 세계피압박민족 반제국주의 대회에 참가하여 세계에 일본제국주의 실상을 폭로하였다. 귀국한 뒤 그 는 비밀결사인 만당을 조직하고 일본으로 유학 가 만당 일본지부 조직 과 만당의 표면단체인 조선불교총동맹의 동경 지부장으로 항일운동을 하였다. 귀국 후 불교 잡지의 주간을 맡아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쓰고, 다솔사ㆍ해인사ㆍ범어사강원에서 강의하면서 항일민족의 식을 고취시켰다. 김법린의 대중불교운동은 “민중본위적 불교운동”의 기치 아래 사회구 제(救濟)불교를 제창하였다. 그는 교화의 대상을 다수의 서민대중에게 두 고, 상식보급과 문맹퇴치가 시급한 문제라고 보았다. 그는 불교청년회(불 청)의 전위적 활동에 의해 신불교운동은 실현된다고 보고 그들의 활동을 요망하였으며, 민중적 불교운동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불전(佛典)의 민중 화ㆍ현대화라고 하였다. 포교의 면에서 김법린은 불교의 농촌진출을 주장하면서, 농촌포교를 위해서는 농촌이 당면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에 불교가 직접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가 제시한 포교란 결국 불교가 민중의 아픔 과 고통을 함께해야한다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불교가 민중과 소통하고 화합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포교를 위해서 농민들에게 교육을 시켜 문맹 퇴치를 해야 한다는 것은 곧 독립을 위한 민중의 역량을 기르는 것과 통하며, 불교의 政敎분리를 내세운 것은 종교의 자유와 독립을 주장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민중들에게 불교를 포교한다는 것은 곧 독립을 위한 민족운동이었으며, 조국의 독립을 위한 민족운동은 곧 포교 운동이기도하였다.
목차
머리말
Ⅰ. 민족운동(1919년~1945년)
1. 범어사를 중심으로 한 3.1운동
2. 해외에서의 독립운동
3. 만당과 조선어학회사건
Ⅱ. 대중불교운동(1928년~1964년)
1. 교육과 포교의 민중불교운동(1928년~1945년)
2. 현실참여 불교운동(1945년~1964년)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김법린의 민족운동과 대중불교」의 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