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rticle

논문검색

3부 응용선학

오대산 월정사의 역사와 전통

원문정보

A history and tradition of Woljeongsa Temple

한상길

피인용수 : 0(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초록

영어

In General, summarizes the flow of the Korean Buddhism that from the three ancient Korean kingdom to the unified Silla Dynasty was period of accept and advancement. Goryeo Dynasty was prevalent in national buddhism, in the period of Joseon Dynasty was suppress Buddhism and modern buddhism was period of ordeal under the Japanese Colonial Period(1910-1945). Looking for ranging from the foundation to modern history of Woljeongsa temple(月精寺), flow and the characteristics of Korea Buddhism for as it is. Woljeongsa templeis a head temple of the 4th District of Jogye Order(曹溪宗) having 70 branch temples and hermitages around Gangwon area including the four Sacred Shrine Temples(寂滅寶宮). Being located on the eastern slopes of Mt. Odaesan(五臺山) in Pyeongchang-gun(平昌郡), Gangwon-do(江原道), the temple was founded in 643 by master Jajang(慈藏: 590-658) after returning from China during the reign of Queen Seondeok(善德女王) of Silla Dynasty according to the record of The Legends and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三國遺事). Jajang went to China around 636 AD because he had a great wish to see Mañjuśrī Bodhisattva(文殊菩薩) in Wutai-shan(五臺山). He is said to see Mañjuśrī Bodhisattva who hinted him to go back to Korea and to meet Mañjuśrī Bodhisattva residing at Mt. Odaesan(五臺山) having the same wording as Wutai-shan in Chinese. For this reason, Jajang built the temple at the site of Mt. Odaesan. During the Goryeo periods, housed by the temple are the Octagonal Nine-story Pagoda(八角九層石塔, National Treasure No. 48) and Medicine Bodhisattva(藥師佛, National Treasure No. 139). These are very important relics because that express prosperity and quality of Goryeo buddhism. The temple was destroyed Joseon periods and rebuilt a number of times, and most memorable reconstruction was a seon master Samyung Yujeong 四溟惟政(1544–1610). He reconstructed a whole temple in 1589, during three years. The temple completely burnt down during the Korean War(1950-53). The present shape of the temple was made by master Tanheo(呑虛) and other famous monks starting from 1964. In recent years, Woljeongsa and Other organizations were formed, Committee of Chargeback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朝鮮王朝實錄), wholesale campaigning its return and finally returned. It must be owens woljeongsa.

한국어

오대산 월정사는 자장율사가 창건한 유서깊은 고찰이다. 창건 이후 고려, 조선을 거처 현대에 이르기까지 절의 역사는 다양한 궤적을 밟아왔다. 한국불교의 흐름을 요약할 때 대체로 삼국-신라불교는 수용발전기, 고려불교는 국가불교의 성행기, 조선불교는 억불·쇠퇴기, 그리고 근대불교는 일제에 의한 수난기라고 정리한다. 월정사의 창건부터 근현대에 이르는 역사를 검토하면 이러한 한국불교의 흐름과 특징이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장율사의 월정사 개창은 신라불교의 수용과 정착과정에서 볼 수 있었던 산악숭배 신앙과 聖跡勝地 신앙을 그대로 반영한다. 왕실과 국가의 적극적 역할이 신라불교를 발전시켰듯이, 태자 보천과 효명의 수행은 월정사의 실질적 창건의 토대를 구축하고 오대산신앙이 형성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월정사의 역사에 국가불교라고 부르는 불교의 번성과 발전 양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현존하는 팔각구층석탑은 많은 고려석탑 중에서도 예술적, 신앙적 가치를 높이 평가받는다. 이 석탑은 고려시대 월정사의 번성과 사격을 가늠하는 중요한 유물이다. 조선시대 월정사의 중건은 사명당 유정을 시작으로 19세기말까지 지속되었다. 사명당의 중건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조선의 건국과 함께 시작된 억불정책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찰은 경제적 기반을 박탈당하였고, 승도는 국가의 신분체제에서 제외되는 등 존립 자체가 위협받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월정사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사명당은 3년 동안 각고의 노력으로 마침내 오대산신앙의 중심처인 월정사를 중창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오대산 史庫가 설치되면서 절은 그 수호사찰로서 국가의 관심과 지원을 받아 법등을 지속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많은 고승이 수행과 전법에 매진하였고, 19세기에는 여러 고승이 강원을 개설, 교학과 법맥의 전승에 힘을 기울였다. 근대기의 월정사는 사찰령이라는 악법에 예속되어 조선총독부의 위세를 가탁한 일본인들에게 산림이 점유되는 등의 수난을 겪었다. 또한 오대산 사고의 조선왕조실록이 총독부에 의해 강탈되면서 절은 수호사찰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월정사의 최대의 위기는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가람 전부가 소실된 일이었다. 그러나 잿더미의 속에서도 각고의 노력 끝에 전각을 중창하여 법등을 다시 이어나갈 수 있었다. 최근들어 월정사 등은 실록의 환수를 위한 환수위원회를 결성하여 대대적인 반환운동을 펼쳤다. 2006년 마침내 현존하는 47책을 모두 돌려받았다. 현재 환수한 실록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으나, 오대산의 사고가 복원되어 있으므로 원래 있던 자리로 돌려놓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다. 억불의 어려웠던 시대에서도 실록 수호사찰로서의 위상을 지녔던 월정사가 이를 통해 다시한번 사격을 정립할 때이다.

목차

국문요약문
 I. 머리말
 II. 신라시대 윌정사의 창건과 자장율사
 III. 조선시대 월정사의 중건과 사명당 유정
 IV. 근대의 굴곡과 교육활동
 V. 한국전쟁의 불행과 월정사의 중창
 VI. 맺음말
 Abstract
 참고문헌

저자정보

  • 한상길 Han, Sang-Gil. 동국대학교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함께 이용한 논문

      0개의 논문이 장바구니에 담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