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영어
Lee Jong-Hoon(pseudonym, Jeong-Am) joined Cheondo-Gyo(or Dong-Hak, a Korean religion) in 1893 and lived in accordance with its doctrine for life. And he developed a national movement under the doctrine of Cheondo-Gyo and its organization. In particular, he prepared the ground of the 1919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on behalf of Cheondoists. In this study, his activities were summarized as in the following: Lee Jong-Hoon participated in the peasant movement led by Cheondoists, and developed an armed uprising. He belonged to the group of Gyeonggi Province, and worked as a leftist under the command of Son Byeong-Hee. After the peasant movement, he helped Choi Si-Hyeong and Son Byeong-Hee to flee safely. And he actively participated in a cultural revolution that broke out in 1904. After the name ‘Dong-Hak’ was changed to ‘Cheondo-Gyo’ in December 1905, he contributed to its development not only at districts but at the central area, backing up Son Byeong-Hee. Immediately after Japan occupied Korea by force in 1910, he attempted to develop independence movements in cooperation with Lee Jong-Il the president of Bo-Seong Company, which was the alliance with Christians, confucianists and old politicians who aimed at nationwide new-life movement and national culture preservation. What is remarkably is that he developed such movements with the motto, ‘Popularization, Unification and Nonviolence’, which was consistent with that of the 1919 Independence Movement. It implies that Cheondoists had prepared the ground of the movement along with the same principle as the 1919 movement. In result, he had been a representative of the 1919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After the 1919 movement, Lee Jong-Hoon participated in Korea Revolution Committee in the capacity of a councilor. The committee was organized by Choi Dong-Hee, a grandson of Choi Si-Hyeong, a nephew of Son Byeong-Hee and a brother-in-law of Hong Byeong-Gi, together with Cheondoists. Afterwards, the committee was developed to Korea Revolution Party, which was in collusion with an organization formed by him on purpose to renovate Cheondo-Gyo. What he chose the new school instead of the old when it is divided, shows his idea well. Altogether, it may be concluded that Lee Jong-Hoon was a Cheondoist who insisted on the revolution of Cheondo-Gyo and aimed to advance to a modern religion and developed a national movement on the basis of them.
한국어
이종훈은 1893년 동학에 입교하여 1931년 사망할 때까지 천도교인으로서 살았던 인물이며, 천도교의 사상과 조직 하에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그는 천도교를 대표한 민족대표로서 3·1운동을 준비하고 지도하였다. 그의 활동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이종훈은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하여 무력에 의한 변혁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경기도 편의장으로서 기포하여 손병희의 휘하에서 좌익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동학농민운동 이후 최시형과 손병희의 피신을 돌보면서 측근에서 보좌하였다. 그리고 1904년 갑진개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1905년 12월 동학이 천도교로 교명을 변경한 후 손병희를 지지하거나 받들며 지방과 중앙에서 천도교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이종훈은 1910년 일제의 조선 강점 직후 보성사 사장 이종일과 협의하여 민중시위운동의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그것은 범국민신생활운동, 민족문화수호운동, 기독교·유림 및 구정객과의 연합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이종훈 등이 제시했던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이라는 민족운동의 3원칙과 민중시위운동의 방법론은 곧 3ㆍ1운동의 방법론과 같은 것이었다. 결국 천도교에서는 이미 3ㆍ1운동의 원칙과 방법론을 이미 일제의 조선 강점 직후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3ㆍ1운동의 ‘민족대표’로 참여하였다. 3ㆍ1운동 이후 이종훈은 1922년 고려혁명위원회의 고문으로 참여하였다. 고려혁명위원회는 최시형의 손자이며, 손병희의 조카, 홍병기의 손위 처남인 최동희가 천도교 내의 인적 기반을 바탕으로 천도교에 대한 혁신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조직된 단체이다. 그리고 이후 고려혁명당으로 발전하였다. 이는 이종훈이 1922년 천도교의 혁신을 주장하며 조직한 종의사후원회와 그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라 보인다. 또한 그가 신구파의 분립시 천도교 신파를 선택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결국 이종훈은 천도교의 혁신을 주장하면서 근대적인 종교로의 발전을 꾀했던 인물이며, 이를 바탕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한 ‘천도교인’이었다고 할 것이다.
목차
II. 동학 입도와 동학농민운동 참여
III. 1910년대의 민족운동
IV. 3ㆍ1 운동기의 민족운동
V.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