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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수륙재 설행의 사회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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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ocial significance of Suryukjae in the former terms of the Chosun Dynasty

한상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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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Chosun Dynasty regarded Buddhim with elimination. Because they are aim to establish Nation of Seongnihak(Neo-Confucianism). But Anti-Buddhism Policy are not carrying out from early period. Lee Taejo(太祖) take up a positive attitude in Buddhim, by repair or enlarge many Buddhist Temples. And he take a consultation of national administration from Buddhist Monk, most typical monk was Muhak(無學大師). Lee Taejo’s most important Buddhist protective policy were National Suryukjae(國行水陸齋). Most retainer were in opposition to Buddhist protective policy, but he held Suryukjae in Samhwa-temple(三和寺) 1395, and Jingwan-temple(津寬寺) 1397. In a narrow opinion to National Suryukjae was to purify the heart at the personal level. He claim to stand for individual pray, but take place an inside national, social background. Lee Taejo groped for way of concentrate in mass by Suryukjae. It was most efficient ceremony among the Buddhist ritual comfort the soul, and through the large scale assembly promote a sense of unity. In other words, he make a confession sin of past and the same time gain the social sympathy After two years later established National Suryukjae, Lee Taejo erected Suryuksa(水陸社) in Jingwan-temple(津寬寺). This place permanent establish Suryukjae. Since then Suryukjae was prevailed all over the country, and very often established. Not to mention comfort the soul, there are several purpose of Suryukjae, hope for long life, relief to a disease, safe voyage, success for descendants, extermination of natural disaster. Therefore it was over the aspect of religion became the traditional culture and manners. After all Suryukjae provided with a foundation could subsist in the Anti-Buddhism periods.

한국어

조선은 불교국가였던 고려의 정치·사회적 모순을 타파하고 새로운 정치이념으로 성리학을 표방하면서 불교를 탄압과 제거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러한 억불정책은 건국초부터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신왕조의 개창자 태조 이성계는 오히려 불교를 적극 신봉하였고, 때로는 사찰을 중수하여 왕실의 원찰로 삼기도 하였다. 즉위 전부터 무학대사 등의 승려를 가까이 두고 국가운영의 자문을 받았고, 각종의 불교의식을 거행하여 백성을 위무하는 등 다양한 불교시책을 펼쳐 나갔다. 태조의 불교옹호 시책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하였다. 즉위 이다. 그러나 신왕조의 새로운 사회질서를 서둘러 구축해야 할 시점에서 국왕의 護佛行事는 성리학으로 무장한 관료들의 입장에서는 구체재의 답습이었고, 척결의 대상다. 태조이러한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조의 수륙재 설행은 1395년(태조 4) 三和寺 등을 시작으로 1397년(태조 6)에는 津寬寺에 國行水陸社를 설치하는 등 오히려 확대되었다. 태조의 국행수륙재 설행은 좁은 의미에서 보면 고려왕족의 참수에 대한 자신의 업장 소멸이라는 개인적 차원이었다. 그러나 태조는 개인의 신앙적 기원을 표방하였지만, 그 내면에는 국가적, 사회적 배경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태조는 신왕조 건국 직후 국가의 안정을 위해 민심을 결집할 수 있는 방안을 수륙재에서 찾았다. 수륙재는 불교의 영혼천도의식 중에서 가장 효율적이었고, 대규모의 의식을 통해 많은 사람이 참여함으로써 공동체의 일체감을 불러일으키는데 더할 나위 없는 효과를 가져왔다. 국왕이 수륙재에 참여하여 고려왕족을 비롯한 신왕조의 개창과정에서 사망한 영혼들을 천도함으로써 신왕조의 포용성과 관용을 보여주었다. 즉 수륙재를 통해 자신의 과거를 참회하는 동시에 사회적 공감과 결집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태조는 국행수륙재를 설행한 지 2년만인 1397년에는 한걸음 더 나아가 진관사에 수륙재를 상설화하는 水陸社를 건립하였다. 이후 수륙재는 본래의 목적인 영혼천도 뿐만이 아니라, 수명 장수, 질병 구제, 해운의 안전, 후손의 發福, 天災 퇴치 등 다양한 목적으로 설행되었다. 바야흐로 수륙재는 불교의식의 종교적 차원을 넘어서 전통문화와 풍속으로 자리매김해 나갔다. 이와 같이 수륙재는 억불의 시대에서 불교가 존립할 수 있었던 중요한 토대를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조선초기 국행수륙재의 설행
 Ⅲ. 수륙재 설행의 사회적 의미
  1. 억불시대 국가행사로서의 수륙재
  2. 전통문화와 풍속으로서의 수륙재
 Ⅳ. 맺음말
 국문 요약문
 영문 요약문
 참고문헌

저자정보

  • 한상길 Han, Sang-Kil. 동국대학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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