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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연암그룹 내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북학론을 전개하였던 박제가, 이희경을 통하여 북학논의와 고학인식의 상관성 문제를 검토하고자 하였다. 청나라로부터 중화문물을 수용하고자 하는 북학논의가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중화의 원형질을 찾고자 하는 순수 지향의 고학의 문제의식은 억제되거나 회피되어야 했다. 본 글에서 정의하였듯이 고학의 문제의식은 古를 분석의 대상으로 삼아 순수한 중화의 원형을 찾고자 하는 경향이 강하였으며, 이러한 사유가 강할 경우 청나라 문물제도를 수용해야 하는 북학의 주장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북학의 주장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중화의 순수성을 찾기보다는 중화의 계승성이 강조되어야 했다. 그렇다면 이희경, 박제가에게 고학의 문제의식은 어떻게 해소되고 정리되었는가. 그들도 여느 儒者들처럼 고학에 대한 문제의식을 회피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그들의 논리 속에서 은연중에 해소되어야 했다. 이희경은 성인 제도의 절대성을 강조하였다. 기예는 점차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성인의 시대에 완성되어 있었다. 오히려 후대에 자의적인 변용이 문제를 가져왔다. 심지어 그는 중국의 가축들도 성인의 가르침으로 인하여 온순하다고 하였다. 이렇게 성인의 제도가 갖는 절대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그 절대성은 ‘상상적’인 것이 되어갔다. 왜냐하면 그 성인의 제도는 사실 실체가 없는 것이며, 성인의 제도를 채우는 것은 현재 청나라의 문물과 제도였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성인의 제도는 가감 없이 후대에 계승되었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인식을 가졌다. 청나라 문물제도의 긍정은 이를 통하여 마련되었다. 옛 성인 제도의 절대적인 신뢰가 청나라의 문물제도를 긍정하는 실제적인 바탕이 된 것이다. 이점은 박제가에게서도 보였다. 박제가는 『주례』의 문제의식을 강조하였다. 특히 이용후생의 도구와 제도와 관련해서 『주례』 「동관」편은 중요하였다. 이용후생의 도구와 제도가 실려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주례』 「동관」편은 처음부터 누락되어 있어서 漢代 이후 많은 지식인들은 「동관」편을 찾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결국 「동관」편을 漢代에 지어진 「考工記」로 대신하였다. 『주례』의 「동관」편 결여는 후대 학자들로 하여금 다양한 상상력을 낳았다. 박제가의 『북학의』도 이 『주례』의 문제의식과 깊은 관련성을 가졌다. 박제가는 『주례』의 문제의식 속에서 『북학의』를 저술하였고, 현재 중국의 문물제도로써 이를 만회하려고 하였다. 특히 연암그룹 속에서 보이는 시의성의 강조는 『주례』의 문제의식과 짝하면서 더욱 현재 중국의 문물제도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과거 하·은·주 시대를 특권화 시키지 않고 각 시대의 시의성을 강조하면서, 중화의 본질적인 계승을 중시하였던 박제가의 사유는 그의 북학론의 중요한 사상적 기반이었다. 여기에는 성인의 제도는 절대적인 것이므로 손상 없이 중국 역사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을 것이라는 암묵적인 가정이 있었다. 앞서 이희경의 경우처럼 옛 성인 제도의 절대성이 오히려 현재 청나라 제도를 존중하게 하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古의 지나친 중시가 今을 무한히 긍정하게 하는 역설적인 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그들의 고학에 관한 문제의식과 북학론의 상관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본 글은 중국어(漢語) 사용 문제와 古董書畵 인식 문제를 구체적인 예로 들었다. 박제가와 이희경은 중국어 사용 문제를 직접적으로 거론하였는데, 여기에서 中國音의 이적성을 드러내고 조선의 한자음, 즉 東音이 곧 古音이라는 방식의 고학적 문제의식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중국어의 고래로 이어져 온 중화성을 인정하고자 하였다. 또한 고동서화 부분에서도 박제가는 이를 주로 심미적인 차원에서 접근하였는 데 비해서 유득공, 이덕무, 성대중 등은 古碑가 함의하고 있는 구체적인 역사학·고증학 등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것은 박제가와 이희경이 북학론을 적극 주장한 학문적 배경을 잘 보여준다. 그들은 고학과 관련한 구체적인 문제의식을 억제함으로써 북학론을 좀 더 적극적으로 주장하고자 하였다. 여기에는 사실 옛 성인 제도의 절대성과 그 계승의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현재 청나라의 중화성을 인정하고자 하는 북학사상의 사유구조가 자리하고 있었다.


This paper is focused on the ideas of the Northern Learning(Bukhak) maintained by Yi Hui-gyeong and Bak Je-ga, two of the most ardent advocates of the learning in the Yeonam group, and concludes that their discourse was not meant to worship only what is here and now. On the contrary, they stressed the importance of achievements and teachings from ancient sages and tried to provide absolute authority to their ideas. Ironically, it was the absolute authority given to the ancient ideas that led Yi Hui-gyeong and Bak Je-ga to worshipping the present. The two scholars had an absolute trust in the teachings of ancient sages and tried to follow them in their everyday lives. They also believed that the sacred teachings from ancient times had been handed over to their generation through the civilization blossomed in China, and stressed for their Korean readers the importance of learning from the heritage preserved and developed in China. It does not mean that Yi Hui-gyeong and Bak Je-ga had little interest in the systems formed by the ancient sages but, on the contrary, they had too much interest in them. The conclusion of this paper is that Yi Hui-gyeong and Bak Je-ga were keenly interested in learning and adopting social and cultural achievements made by their contemporaries in Qing China because they believed that these were the heritage developed from the absolute authority of the ancient sages they rever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