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영어
This writing examined how academic exchanges were being attained between YunJeung, who is a typical scholar in Soron(the Westerners and Southerners, etc.) in the latter term of Joseon, and GwonSi, who is his father-in-law. GwonSi(権諰) taught his son-in-law YunJeung(尹拯) not to indulge in metaphysical Neo-confucian theory(性理説) and to positively practice daily morality. As the characteristic in YunJeung's learning is obtained frequently in emphasizing an effort for substance, his this academic characteristic is considered to be probably associated with GwonSi's teaching.
Meanwhile, both persons, GwonSi and YunJeung, were acutely opposed to each other on the contemporarily political questions. What had specifically and directly influence upon circumstances of both persons included YunJeung's critical attitude toward Jujahak(Zhu Xi philosophy), adverse criticism in people of Giho province surrounding him, and Controversy over courtesy(禮訟).
The approaching attitudes in two people toward these matters were completely different. GwonSi advocated YunHyu(尹鑴)'s academic attitude and asserted 3-year condolence, but YunJeung was critical about YunHyu, and was negative even about 3-year condolence. Both persons, who had the exactly opposite thought, didn't abandon own opinion in the end regardless of xchanging
opinions several times.
In a nutshell, YunJeung and GwonSi had some interchanges in light of learning, but can be said to have shown the sharp confrontation in a political opinion. This will be connected to a point that GwonSi was Namin(南人) and YunJeung was Soron(少論).
한국어
이 글에서는 조선후기 소론(少論)의 대표적 학자인 윤증과 그의 장인인 권시와의 학문적 교류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었던 가를 살폈다. 두 사람이 사제 관계를 맺은 것은 윤증의 나이 20세 때 권시의 사위가 되면서 였다. 윤증은 이미 그 이전에 아버지와 유계(兪棨)의 가르침을 받고 있었으므로 권시로부터 받은 영향이 결정적이지는 않았다.
권시는 사위 윤증에게 고담준론의 성리설(性理說)에 천착하지 말며 일상에서의 도덕 실천에 힘쓸 것을 가르쳤다. 윤증 학문의 특성을 흔히 무실(務實)을 강조한다는 데서 구하는데, 이것은 아마도 권시의 가르침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한편, 권시와 윤증 두 사람은 당대 정치적 현안에 대해서는 첨예하게 대립했다. 두 사람의 신상에 공히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일은 윤휴(尹鑴)의 주자학에 대한 비판적 태도와 그를 둘러싼 기호 지역 사림들의 논란, 그리고 복제(服制)에 대한 논쟁이었다. 두 사람이 이 사안들에 대한 접근 태도는 전혀 달랐다. 권시는 윤휴의 학문적 태도를 옹호하고 3년상을 주장했지만, 윤증은 윤휴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또 3년상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정반대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두 사람은 여러 차례 의견 교환을 하면서도 끝내 자기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요컨대, 윤증과 권시는 학문상 어느 정도 교류가 있었지만, 정치적인 의견에서는 첨예한 의견 대립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권시가 남인(南人)이었고 윤증이 소론(少論)이었던 점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목차
1. 머리말
2. 만남의 두 축 : 장인과 사위, 스승과 제자
3. 서로 다른 시선 : 윤휴의 학문 활동과 예송(禮訟)에의 이견
4. 맺음말
Abstr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