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The Close Relationship between Myeongjae Yunjeung's Family and Sinam Yugye
명재 윤증가와 시남 유계의 교유
초록
영어
The assessment of Myeongjae Yunjeung' political life is entirely different before and after his death. This reflects his life mired in heated political disputes.
Therefore, it is not easy to make a history-based assessment or reinterpretation of him. The relationship between Yunjeung's family and Sinam Yugye noted in this thesis is characterized by conflict and confrontation rather than cooperation.
However, the author intends to focus on a deep connection and companionship between the two parties rather than conflicts.
Yugye was a much- respected man who was included in Chungcheongohyeon with Yunjeung' father Yunseongeo. Yugye is known to have remained neutral at the signs of the division attributed to the confliction among Hoseosanrim without joining any political party until his death. He and Yunseongeo studied together and kept intimate friendship all their lives. Whiling living at
Sancheonjae in Geumsan where, he said, he spent the most happiest period of his life, the friends he associate with were all from Papyong-yun family. In addition, the fact that Sancheonjae was utilized as a learning place by Yunseongeo and his son implies the close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families.
When Yugye passed away at the age of 58 in 1664(in the 5th year of Hyeonjong), Yunjeung' father Michon Yunseongeo wrote a eulogy for him.
Yugye also had written a gravestone for Yunseongeo' father Yunhwang. In addition, Yunjeung was deeply involved in his teacher Yugye's publishing work and wrote on a gravestone when he died. Yugye kept very close relationship with Myeongjae Yunjeung's family by anybody's standard. But being involved in political disputes over Garye wolly later, Yunjeung was blamed for betraying his teacher. But, indeed Yugye liked and trusted his student Yunjeung and personally asked him to revise Garye wolly. Given that Yugye and the Papyong-yun family
had a brotherlike relationship, disputes over the publication of Garye wollyu seems to have been wrongly understood by later generations.
한국어
명재(明齋) 윤증(尹拯)에 대한 정치적 평가는 생존시와 사후가 극명하게 대비된다. 이처럼 윤증에 대한 평가가 상반된 면을 보이는 것은 격렬한 당쟁에 휩싸였던 그의 일생을 반증하고 있고, 따라서 올바른 역사적 평가와 재해석도 결코 쉽지 않은 과제이다. 본고에서 주목하는 명재 윤증의 가문과 시남(市南), 유계(兪棨)의 관계는 ‘교유’보다는 ‘갈등과 시비’로 비쳐진다. 그러나 필자는 본고에서 갈등의 측면보다 깊은 인연과 교유를 주목하고자 한다.
유계는 윤증의 부친 윤선거와 함께 충청오현(忠淸五賢)으로 손꼽힐 정도의 존경하는 어른이자 스승이었고, 유계는 호서산림간의 갈등으로 분열하려는 조짐 속에서 중간의 위치에 있으면서 편당하지 않고 생을 마쳤던 인물로 알려진다. 특히 윤증의 부친 윤선거와 유계는 동문수학한 사이를 넘어 평생 동안 마음을 터놓고 지낸 친구였다. 유계가 일생 중 가장 즐겁던 시절로 회고하는 금산의 산천재(山泉齋) 시절의 교유 인물들이 모두 파평윤씨 명재가의 인물들이었고, 산천재가 후일 윤선거 부자의 학문터전으로 활용된 점도 두 가문의 친밀한 인연을 반증한다.
유계가 1664년(현종 5) 58세로 서거하자 윤증의 부친인 미촌 윤선거는 유계의 행장을 짓고, 유계 또한 윤선거의 부친인 윤황의 묘표를 지었다. 그런가하면 제자인 윤증은 스승의 묘지명을 짓고, 유계의 문집(市南集) 편찬에 가장 깊이 간여할 정도였다. 유계는 누가 보어라고 하여도 다른 호서사림과의 교유 중에서 명재 윤증의 가문과 가장 긴밀하고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후대에 당론에 연관되면서 가례원류의 일로 명재 윤증은 스승을 배반했다는 혹평을 받는다. 그러나 유계는 윤증에게 가례원류 수정을 직접 지시할 정도로 믿고 아끼는 수제자였고, 유계와 파평윤씨 가문이 형제와 같은 친밀한 관계였던 점을 고려할 때 가례원류 편찬시비는 후대의 여러 주변 정황에 의한 불균형을 이룬 것이라 할 수 있다.
목차
1. 머리말
2. 생애 년표의 비교 - 生時의 친연관계 -
3. 명재가와 시남의 교유
1) 호서사림과 시남 유계, 명재 윤증
2) 명재와 시남의 학맥
3) 명재가와 시남의 교유
4. 명재와 시남의 관계
1) 시남과 명재의 친연
2) 家禮源流와 시남, 명재
5. 맺음말 - 山泉齋의 두 가문, 그리고 사제 -
참고문헌
Abstr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