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The Perception of Enlightenment Thought about Modern World and Their Responses in Korea
초록
영어
Western impact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formation of Sirhak(Practical Learning), and a central role in the formation of Enlightenment Thought, in the Late Yi Dynasty. Not only the foreign impact but also the Sirhak contributed to the formation of Enlightenment Thought. Persons educated by Sirhak could become Enlightenment thinkers easily. Enlightenment Thought contributed to the opening doors to Japan and Western countries, and was embodied by modernization policies since 1879.
Enlightenment Thought was divided by the conservative party that dung to Confucian morals, tried to introduce modern technology, but was passive in institutional transformation, and the progressive party that was active in not only introducing modern technology but also transforming institutions. Both the conservative party and the progressive party did not presuppose agricultural society, but the conservative party intended to maintain the traditional monarchism and the traditional Chinese world order unlike the progressive party. Policies transforming institutions to induce free competition and property rights had priority in the progressive party, while policies promoting modern industries had priority in the conservative party.
The failure of independent modernization can be explained not only by the severe and unfavorable foreign environment but also by the weak internal capabilities such as the poor public financial abilities, the poor capital, the inefficient bureaucracies, the inability to make representative government and so on. But the Korean contact with modern world and its experience of modernization before the colonization contributed to the modernization and industrialization in the 20th century. Though the Confucian fundamentalists foretold the imperial aggression better than the Enlightenment thinkers, they did not have the scientific ground, and did not know the benefits from relations with modern world.
한국어
외부 자극은 조선후기 실학의 성립에 중요한 역할을, 개항 전후부터 개화사상의 대두에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개화사장의 형성에는 실학사상의 기반도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즉, 실사와 경세를 중시하는 학풍의 인물들이 외부 충격의 강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면서 개화사상가로 전환하였던 것이다. 개항부터 갑신정변 이전까지는 선진 사상이 정책으로 구현되었는데, 여기에는 동도서기론자로 전환한 고종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1879년 이홍장의 권고 이후부터 1884년 갑신정변까지는 동도서기사상이 정립되어 그에 입각한 근대화정책이 추진되고 변법개화사상이 출현하여 그것을 추구하는 정변이 일어난 점에서, 근대화 사상·정책의 진전이 가장 괄목할 만한 시기였다.
동도서기파는 척사파와 마찬가지로 국내적으로 삼강오륜과 왕도정치의 구현을, 국제적으로 중화세계질서의 존속을 바랐으나, 척사파와 그 실현 방안을 달리 하여 서양 기술의 도입과 상공업의 발전으로 부강해져 동도를 보존하기를 바랐다. 변법개화파는 전제군주제와 중화세계의 유지를 의도하지 않고, 산업사회를 확고히 전망하였다. 대체로 보아 변법개화파는 영업의 자유, 경쟁의 촉진, 재산권의 보장 등을 통해 시장의 발전을 도모하고자 했음에 반해, 동도서기파는 시장제도의 기반 조성에 소홀하고 영업자유원칙에 손상을 가하기도 하면서도 산업육성책을 추진하였다.
자주적 근대화를 성취하지 못한 데에는 가혹하고 불리한 외압뿐만 아니라 내부 역량의 부족도 작용하였다. 후자는 재정기반과 민간자본의 미약, 근대화 기획·추진 역량의 미약함 등으로 집약할 수 있다. 조선의 대응은 가혹한 외압을 극복할 정도로 진전하지는 않았지만, 식민지기 근대화, 나아가 해방후 경제발전을 뒷받침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제적 제국주의의 개념이 1902년 처음 정립된 점에서, 19세기말 개화사상가에게 그것을 몰랐던 책임을 추궁하는 것은 가혹한 일이다. 이들도 만국공법의 질서 아래 약육강식의 현실이 있다는 인식은 하고 있었다. 위정척사사상과 동학이 개화사상보다 제국주의적 침략을 결과적으로는 더 잘 예측한 셈이지만, 이들은 화이관 등에 입각하여 그것을 이해하여 과학적인 논거를 가지지 않았고, 근대세계와의 교류의 이점을 파악할 수 없었다.
목차
1. 머리말
2. 실학사상 단계의 대외 인식
3. 과도 단계의 대외 인식과 開港
4. 개항 후 동도서기론의 대외 인식과 근대화정책
5. 개화파의 분화와 변법개화파의 갑신정변
6. 갑신정변 이후 개화사상ㆍ정책의 진전과 한계
7. 개화사상의 구조
8.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