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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武王의 思想과 大王巖傳說 - 평화와 호국 -

원문정보

文武王の思想と大王巖傳說 - 平和와 護國 -

문무왕의 사상과 대왕암전설 - 평화와 호국 -

永田正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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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한국어

본 논문은 新羅 제30대 文武王이 水中陵에 담은 염원에 관해 고찰한 것이다. 많은 관련 서적이나 안내서 등은 ‘죽어도 護國의 龍이 되어 倭寇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이 陵을 만들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문무왕은 그가 남긴 遺言에서 신라가 평화스런 시대를 맞이하였다고 강조하고 있고, 대외 경계심을 전제로 한 기존설과는 내용을 달리 하고 있다. 본 논문은 문무왕이 수중릉을 만든 동기를 왕의 유언 내용을 중심으로 해석한 것이다. 기존설은 史料的 근거가 애매하고, 󰡔三國史記󰡕에 기록된 문무왕의 日本觀과 모순되며, 당시 신라와 일본과의 관계로 보아서도 모순이 있다. 신라와 일본의 관계는 문무왕 이전 160년 동안 왜구의 침입이 없었으며, 당시 신라의 국력으로 생각해도, 地政學的으로 보아서도, 왕이 바다에 장사지내고 호국의 용이 되어야 할 정도로 일본의 위협은 크지 않았다. 나라의 平安 유지의 기원은 모든 외국의 침략이 없기를 기원한 것이다. 대왕암 전설은 문무왕 사후의 시대상황을 반영해서 형성된 것이다. 대왕암 전설의 핵심인 ‘龍’에 대한 인식은 고려시대 몽골 침략 이전의 󰡔삼국사기󰡕에는 ‘왕이 화한 용’이라고만 기록되어 있고, 몽골 침략기에 편찬된 󰡔삼국유사󰡕에는 ‘호국의 용’으로 변하고, 왜구, 임진왜란 등의 침략이 있었던 조선시대 문서에서는 ‘일본의 침략을 막는 용’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한국이 위기에 직면할 때 마다 문무왕의 뜻이 ‘호국의 용’이라는 용신신앙으로 강조하게 되었고, 왜구의 피해를 자주 입게 되자, 사람들은 왕이 호국의 용이 될 때 염두에 둔 나라는 일본이었다고 믿게 되었다. 문무왕은 유언에서 왕릉과 사람의 靈魂救濟를 관련지어 말했다. 그것은 능과 자신의 영혼구제를 관련시킨 말이다. 또한 호화스런 왕릉을 비판한 말에는 문무왕이 스스로의 능을 권세를 자랑했던 옛 왕들과 다른 동기로 만들 것이라는 의지가 담겨져 있다. 그러한 문무왕의 개성과 사상은 용신신앙과 외국에 대한 경계심을 배경으로 하는 대왕암 전설로는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문무왕 사후 두 사람의 왕이 화장되어 바다에서 장사지냈으나, 그들의 동기는 統治 실패에 대한 참회의 마음이었다. 두 왕에게 문무왕은 용이 되어 싸우는 왕이 아니라 패자도 포용하는 慈悲스런 왕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유언에 나타난 문무왕의 개성과 일치한다. 당시 新羅王室에서는 대왕암 전설이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왕실에서의 문무왕과 수중릉의 이미지는 유언 내용에 따라 형성되고, 민간의 이미지는 용신신앙을 배경으로 형성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평화’와 ‘호국’과 ‘참회’는 서로 관련이 있다. 호국의 염원 앞에는 平和의 염원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경건한 불교 신앙을 가진 문무왕은 因果 應報의 가르침에 따라 나라의 평안이라는 염원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전쟁 가운데 신라가 범한 살생의 죄가 속죄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즉 바다에 능을 만든 행위는 참회의 마음이 담긴 행위였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문무왕이 유언 가운데 자신의 능과 사람의 영혼 구제를 연계해서 말한 이유를 풀 수 없다. 평화와 참회의 마음으로 만든 수중릉은 동아시아 평화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어

本論文は, 新羅30代王, 文武王(626~681)が海中陵に込めた意思に關して考察したものである. 多くの關連書籍や案內は, 王が「死して護國の龍となり, 日本軍の侵略から國を守る」ために, この陵をつくったという大王巖伝說にしたがい說明している. しかし, 文武王の遺言は平和な時代の到來を强調しており, 對外警戒心を前提とする從來の說と, 大きく趣が異なるのである. 本論文は, 文武王が海中陵をつくった動機をこの遺言の內容から求めたものである. 從來說は, 史料的根據が曖昧であり, 󰡔三國史記󰡕に記された文武王の日本觀と矛盾し, 当時の新羅と日本との關係から見ても矛盾する. 新羅と倭の關係は, 文武王以前160年間倭寇の被害はなく, 長い間友好的に交流していた. また当時の新羅の國力から見ても, 地政學上から見ても, 王があえて海に葬られ, 護國の龍に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に程に日本の脅威は大きなものではなかった. 國の平安の願いは, すべての外國による侵略がないことを祈願したものである. 大王巖伝說は, 文武王死後の時代狀況を反映して形成されたものである. 大王巖伝說の核心である「龍」に對する認識は, 高麗時代, モンゴル侵略以前の󰡔三國史記󰡕には「王が化した龍」とだけ記され, モンゴル侵略期の󰡔三國遺事󰡕には「護國の龍」となった. また, 倭寇の襲來, 文祿․慶長の役などを経た朝鮮時代の文書は「日本の侵略を防ぐ龍」と変化したのである. 一方, 文武王は遺言で, 王陵と人の魂の救いを關連づけて語った. それは海中陵に自身の靈魂の救いを託す言葉である. 文武王死後ふたりの王が火葬され, 海に葬られたが, その行動の動機は懺悔であった. ふたりの王にとって文武王は, 龍となり戰う王というより, 敗者をもつつみこむ慈悲深い王であった. それは, まさに遺言で示された文武王の個性なのである. 当時, 王室での文武王のイメージは遺言により, 民間のイメージは龍神信仰に基づいていたと思われる. 文武王の個性と思想は, 龍神信仰と外國への警戒心を背景とする大王巖伝說で捉えるべきものではない. 「平和」と「護國」と「懺悔」は互いにつながりがあるものである. 護國の願いの前には平和の願いがある. また, 敬虔な仏敎信仰をもった王は, 因果応報の敎えにしたがい, 國の平安という願いを果たすためには, 戰爭の中で新羅がおかした殺生の罪が贖われなければならないと信じた. すなわち, 海中に陵をつくるというのは, 懺悔の意志がこめられた行爲だったと思う. そうとらえなければ, 文武王が遺言の中で, ことさら靈魂の救いにこだわった理由を解くことはできない. このような氣高い心をもった文武王が, 平和と懺悔の心から海中陵をつくったならば, それは東アジアの平和の象徵と言うことができる.

목차

국문초록
 I. 大王巖傳說의 問題點
 II. 大王巖傳說의 檢證
 III. 平和와 護國
 IV. 遺言에서 본 文武王의 思想과 水中陵
  1. 平和의 遺言
  2. 懺海를 示唆하는 말
  3. 바다에 葬事지낸 두 王과 文武王
 V. 結論
 文武王의 遺言
 參考文獻
 日文要約

저자정보

  • 永田正治 서라벌대학 관광일본어과 전임강사, 일본근세사, 고대 동아시아 관계사 전공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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