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영어
This paper deals with two problems. One is the argument that the term 'suyang'(修養, xiuyang[in chinese pronunciation]) should be substituted for the term 'gongbu'(工夫, gongfu[in chinese pronunciation]), the other is the illumination of the identity of the theory of gongbu. The reason that I argue the substitution of the term 'suyang' for the term 'gonbu' is simple. It is that what has been referred by the term 'suyang' was traditionally expressed as 'gongbu', furthermore the 'suyang' was used for negative meaning by zhuxi(朱熹) and chengyi(程頤) who were the best authorities in the history of Neo-conficianism. That is to say, the meaning of 'suyang' was Taoist practice and discipline for them. The second problem of this article, the identification of
the theory of gongbu is the identification of the theoretical realm of the theory.
I argue that the theory of gongbu is philosophy in the methodological aspect, at the same time it is pedagogy in the material aspect. In connection with the argument that the theory of gongbu is philosophy, I argue that it is philosophy belonging to a new field, not traditional field. The new field of philosophy is 'metapraxis', which is suggested by Thomas P. Kasulis. Shortly speaking,
metapraxis is reflection upon practice. I take the theory of gongbu for metapraxis, because it is reflection upon the internal practice trying to formation of an ideal man. The significance of the identification of the theory of gongbu lies in exclusion of the misunderstanding which researches and discussions have been accompanied with. The prominent of the misunderstandings in connection with researches of the theory of gongbu is that it is treated as a sort of epistemology. For example, zhuxi's theory about acuirement of knowledge and wisdom has been regarded as a kind of empiricist epistemology. It is, however, never a sort of epistemology but a part of the theory of gongbu, and belongs to metapraxis. Like this, the building of 'philosophy as metapraxis' is needed to eliminate illusions. epistemology and metapraxis are both philosophy, but they belong to different fields of it. The former logically eflects knowledge, the latter logically reflects internal practice. The matter of reflection between the two is different, therefore they belong to the different realm of philosophy.
한국어
이 논문은 두 가지 문제를 명확히 하는 데 할애되어 있다. 그 중 하나는, 비교적 부차적인 문제로서, 기존의 ‘수양’이라는 용어를 ‘공부’라는 용어로 대체하는 것이 더 적절함을 밝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부론의 이론적 정체성을 해명하는 것이다. 필자가 ‘수양’이라는 기존의 용어를 ‘공부’라는 용어로 대체할 것을 주장하는 근거는 단순하고 직절하다. 그것은 오늘날 ‘수양’이라는 용어로 지칭하고 있는 바로 그 대상이 전통적으로 ‘공부’라는 용어로 표현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주체의 변형을 통해 모종의 이상적인 인간을 형성하려는 재귀적인 노력을 ‘공부’라는 용어로 표현했던 신유학(新儒學)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二程과 朱熹는 ‘수양’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도교적인 기공 수련을 가리키는
데 한정하여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논문의 두 번째 과제인 공부론의 이론적 정체성 확인은 공부론이 철학임과 동시에 교육학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필자는 공부론이 그 방법적 측면에서 보자면 철학이고, 인간 형성의 이론이라는 점에서, 즉 내용적 측면에서 교육학의 부분 이론임을 밝힌다. 특히 공부론이 철학이라는 점과 관련하여, 필자는 그것이 철학의 전통적 영역에 속하지 않는 색다른 철학임을 확인한다. 그 색다른 철학 영역이란 카슐리스가 칭한 ‘메타프락시스’이다. 메타프락시란, 간단히 말해, 실제적 체험의 반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공부론이 바로 이 메타프락시스로서의 철학에 속한다는 주장은 그것이 공부라는 특정한 인간상의 형성을 위한 노력으로서의 실제적 체험을 반성한 결과라는 점에서 성립한다.
이렇게 공부론의 이론적 정체성을 분명하게 확인하는 것은 공부론의 연구와 논의에 불필요한 오해들이 개입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공부론과 관련한 오해들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그것이 인식론의 일종으로 취급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주희의 격물론이 인식론의 일종으로 취급되는 것이 그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주희의 격물론은 공부론의 일부요, 일종의 메타프락시스이지 인식론이 아니다. 양자는 기본적으로 철학적 반성의 자료를 달리한다. 인식론은 인식 또는 지식을 반성의 자료로 하지만, 메타프락시스는 주체의 변형을 통해 목적하는 인간 형성을 위한 재귀적 노력, 즉 실제적 체험을 반성의 자료로 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전혀 다른 철학 영역이다. 메타프락시스로서의 철학인 공부
론은 그 방법적 측면에서는 철학이고, 그 내용적 측면에서는 교육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좀 더 적실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한 마디로 교육철학이며, 교육철학의 마땅한 모습을 보여준 사례일 것이다. 그것은 공부론이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교육의 문제인 인간 형성의 문제를 철학적 반성의 자료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工夫’ 및 ‘공부론’이라는 용어의 적절성
2. 공부론의 이론적 정체성
Ⅲ. 결 론
<참고 문헌>
Abstr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