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영어
This treatise will attempt to discuss the life and thoughts of Seosan Huejung(1520~1604) who was a representative Seon master of the middle years of the Joseon Dynasty. Officially, Joseon was a country of which the governmental ideology was Sung Confucianism. For this reason, there is a point of view that it was hard to find Buddhism during that period of time. However, it is necessary for people to get out of this view and properly understand the Joseon Dynasty based upon the historical facts and exhaustive philosophical discussion. This is because most of nearby the early days foundation of a country the first term of Confucians are still 'Confucians outside but Buddhists inside', emphasizing 'Confucianism outside but Buddhism
inside', and thinking that 'their traces were of Confucians but their mind was of Buddhists'.
Chung-heo Hyujung(淸虛 休靜) a famous philosopher of the middle years of the Joseon Dynasty, was primarily a Confucian but he lived his life as an exemplary ascetic after entering into Buddhism. As a person responsible for the religious body, he established the prestige of the Buddhist society and the identity of Buddhism by reestablishing religious traditions and pulses based on practice of Seon.
During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he had a decisive role of turning the tide of the war by issuing a manifesto and sending monk soldiers, after receiving a 교지 from 선조. Huejung established his own ideological system to Buddhism, Taoism and Confucianism ‘삼교회통’(三敎會通)이라는 매개항을 통해 ‘Ilmul(一物) 혹은 Seonsim(禪心)의 길’과 ‘널리 살아있는 이들을 제도’(普濟生靈)하기. For Huejung, mercy and 일물 are all about his ideology. By these, he solved the
questions for Buddhist meditation. Also, he is distinguished from other philosophers, because he accepted ascetic exercises of the Buddhist Elysium even though he was a Zen master. Huejung's mercy corresponds to Won-hyo's wholeheartedness and Ji-nul's sincerity and it is an another expression of ilmul.
For the consilience of Seon and Kyo, he found out the originality of Korean Buddhism by suggesting to write Seongaguigam(禪家龜鑑) find a way of out of Sakyoipseon(捨敎入禪) or Chakyoipseon(借敎入禪). This was realized as advancement or together studies(兼學) of Seon(禪, Zen) and Kyo(敎). Huejung's thought system of this Seonkyo to be situated frame of truth and an expedient later became the mainstream of Korean Buddhism. Consequently, now that his
mercy theory is the basis of Korean Buddhism, framework of seonsim should be newly analyzed.
한국어
이 논문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 선사였던 서산휴정(西山休靜, 1520~1604)의 삶과 생각을 선심학의 기호로 살펴보기 위한 것이 다. 조선은 공식적으로는 유교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한 국가였 다. 이 때문에 불교는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관점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시각에서 벗어나 역사적 사실과 철학적 논구의 검토 위에서 조선조를 올바르게 파악해야만 한다. 개국 초기와 가까웠던 전기의 유자들 대부분은 아직까지 ‘겉으로는 유자이면서도 속으로는 불자였고(陽儒陰佛)’, ‘밖으로는 유학을 내세우면서도 안으로
는 불학을 갈무리했으며(外儒內佛),’ ‘자취는 유자였으나 마음은 불자였다(迹儒心佛).’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 불교사상가였던 청허휴정(淸虛休靜)은 유자로 출발했으나 불교에 입문하여 모범적인 수행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는 교단의 책임자로서 불교계의 위상을 새롭게 건립했으며, 선법을 기초로 한 법통과 법맥을 확고하게 재정립함으로써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확립시켰다. 임진왜란 때에는 선조의 교지를 받고 격문을 써서 승병을 일으키게 함으로써 밀리던 전세를 뒤바꾸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휴정은 유불도 ‘삼교회통(三敎會通)’이라는 매개항을 통해 ‘일물(一物) 혹은 선심(禪心)의 길’과 ‘널리 살아있는 이들을 제도하기(普濟生靈)’ 위한 독자적인 사상적인 체계를 세웠다. 휴정에게 있어 선심과 일물은 그의 전 사상을 꿰는 키워드이다. 휴정은 이 기호를 통해 자신의 사상적 화두를 풀어나갔다. 그는 또 선사임에도 불구하고 정토(淨土) 수행을 수용함으로써 여타의 사상가들과 변별되고 있다. 휴정의 선심은 원효(元曉)의 일심(一心)과 지눌(知訥)의 진심(眞心)에 대응되는 개념이며 일물(一物)의 다른 표현
이다.
그는 선과 교의 회통을 위해 『선가귀감』을 지어 사교입선(捨敎入禪) 혹은 차교입선(借敎入禪)의 활로를 제시함으로써 한국 불교의 독자성과 특수성을 적출해 내었다. 그것은 선과 교의 병진(倂進) 또는 겸학(兼修)로 나타났다. 이러한 선교를 진실과 방편의 구도로 위계를 세운 휴정의 사유체계는 이후 한국불교의 주요한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따라서 휴정의 선교(禪敎) 이론이 오늘 여기 한국불교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선심학은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목차
2. 성리학의 변화와 추이
3. 출사 시도와 출가 결행
4. 선심과 일물의 지형도
1) 선심의 구조
2) 회통(會通)의 논리
3) 제생(濟生)의 실현
5. 선법과 염불의 병진
6. 타파: 정리와 맺음
국문요약문
영문요약문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