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영어
The identity and originality about Neo-confucianism(Shil-hak) have been argued very often in the post-Yi-dynasty. Some scholars appointed Catholic as the background of Neo-confucianism(Shil-hak). Especially they insisted that Dasan Jung Yakyong copied ‘God(sangjae)’ from ‘The father(Deus)'. There were many Catholic in Dasan's family and the people near him. And when Dasan was young, he read a book called 「De Deo Verax Disputatio(天主實義)」. However it is wrong to say that Dasan is Catholic because of this reason. I do not think that Dasan Copied the theory from Catholic. First of all, Dasan himself said that he boycotted Catholic. There was no proof that he was a Catholic in his theoretical Study nor in his practical study. And the books shows no poof that it had received influence from Catholic. Dasan's Neo-confucianism received affects from Original confucianism(confucius theory). He re-translated the Confucian bible and insisted that the God(sangjae, 上帝天) and the Anti-confucionism structer theory, Social-engineering all had received on Original confucianism. Dasan's God and the Catholic God had difference in role and category. Western science and Catholic are different. Dasan compared the two, but the scholars at that time did not. It's because western science is the problem of scholarship and knowledge, but Catholic is the problem of faith in religion. However Dasan had no religious belief in Jesus. The one Dasan had feared and respected was ‘God(sangjae)’. ‘God(sangjae)’ is often appeared in the Chinese classical literature. Therefore it is right to say that Dasan is not a Catholic but an Original confucianism The important thing in Dasan's Neo-confucianism is variety, acceptance, and social criticism and He had love for the people.
한국어
조선 후기 실학의 정체성과 연원에 관한 문제는 늘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 가운데 일부 학자들은 실학의 형성 배경으로 서학을 지목하기도 하였다. 특히 실학의 집대성자로 불리는 다산 정약용의 경우 그의 경학 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상제천(上帝天) 사상이 천주교의 ‘천주’개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만약 다산실학이 천주교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라면, 조선 후기 실학은 성리학에서 탈피한 새로운 유학으로 분류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많은 오해에도 불구하고 다산 실학의 연원을 서학에서 찾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다. 우선 다산은 주변 인물들이 천주교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배교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아울러 수많은 저술들에서도 천주교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직접적인 증거를 찾기 어렵다. 다산이 사숙하였거나 교유하였던 인물들 전부가 천주교 신자였던 것은 아니었으며, 그의 경학 사상과 경세학의 일관된 체계 사이에서 천주교가 이러한 구조의 기저를 형성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다산 실학의 연원은 오히려 육경(六經)을 중심으로 한 원시유학, 곧 수사학(洙泗學)에서 찾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육경사서를 새롭게 주해하면서 드러나는 그의 상제천 사상과, 탈성리학적 경학 구조, 그리고 사회 개혁론 모두가 그 기반은 원시유학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산 실학의 근대적 요소, 즉 그의 개혁론들 또한 서학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 아니라 유학 본래의 구세 정신과 다양한 행정경험, 백성과 고락을 함께 하면서 생겨난 애민(愛民)정신의 발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다산 실학을 평가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서학이나 천주교보다는 그의 학문적 개방성과 포용성, 치열한 현실 비판의식 속에 녹아 있는 그의 실학 정신이 무엇이었는가에 더 깊이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