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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南龍翼의 「儷評」에 나타난 騈儷文에 대한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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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th Century Perception of Nam Yong-ik’s Byunryeo-un

17세기 남용익의 「여평」에 나타난 병려문에 대한 인식

박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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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The bureaucratic literati who took part in the government along with the founding of Joseon emphasized the splendid style and rhetorical skills, insisting on repaying the country with writing. Although the Sarim faction[士林派], which was based on the classics, denied literature for literature’s sake and argued that the classics were the foundation of writing and that literature and the classics were one, the status of Byeonryeo-mun[騈儷文] as the national writing system was firm. By defining only sentences based on the classics as true sentences, the Byeonryeo-mun was not given much attention. The prevailing perception was that if it was not an old text, it was not a good sentence. In the 17th century, Joseon’s literary world actively compiled anthologies of Byeonryeo-mun as a way to professionally learn Byeonryeo-mun. In addition, there was a tendency to include the results of individual creations in anthologies and to include the ‘Ryeo-mun[儷文]’ section separately. In this case, unlike the anthology of poems written in the Gwanak-style[館閣體], both the Seoyu-style[徐庾體] and the Gwanak-style appear according to personal preferences. Nam Yong-ik[南龍翼]’s “Ryeopyeong[儷評]” is a notable source that acknowledged the value of Byeonryeo-mun and discussed it in earnest in this atmosphere at the time. Of course, even at that time, the value of Byeonryeo-mun was recognized to a limited extent, focusing on the Gwanakche-style, but it is very meaningful to recognize the value of both Seoyu-style and Gwanak-style styles and understand their historical flow. The mention that Im Suk-young[任 叔英] inherited the Seoyu-style and Lee Sik[李植] inherited the Gwangak-style is an example of his outstanding insight, explaining the development process of Joseon Byeonryeo-mun. He briefly described the development process of Chinese Byeonryeo-mun from the origin of Byeonryeo-mun to the change of the Seoyu-style in the Song Dynasty and the emergence of the Guangak-style. Next, the characteristics of major writers from Silla to Joseon were discussed. In particular, Im Suk-young was recognized as a writer comparable to the Four Great Writers of the Early Tang Dynasty[初唐四傑] and was elevated to the status of the greatest master of the Joseon Dynasty’s great writers. Nam Yong-ik, while evaluating the Chinese and Korean versions of the Byunryeo-mun, identified ‘precision[精]’ as the core of the Byunryeo-mun. This is a critical standard closer to the Seoyu-style than to the Gwangak-style, and seems to have originated from Nam Yong-ik’s liking for the Seoyu-style. In the late 17th century, several writers who actively utilized the Byunryeo-mun in their writing appeared in Joseon’s literary world. Due to the unique nature of the 17th century Joseon literary world, which was subject to torture, not many works of the Byunryeo-mun were created. Nevertheless, the recognition and creation of the 17th century Byeonryeo-mun is significant in that it was a transitional effort to question and explore existing literary theories.

한국어

조선의 개국과 함께 정권에 참여한 관료형 문인들은 文章報國을 주장하며 華美한 풍격과 修辭의 시적 기교를 중시하였다. 道學을 바탕으로 한 사림파가 詞章을 부정하고 經術 이 문장의 근본이라는 經文一致를 내세웠지만, 국가의 문장으로서 변려문의 지위는 확고 하였다. 그러나 16세기 중국의 복고주의 문학론이 유입되어 古文이 강조되면서 변려문의 지위는 크게 흔들렸다. ‘經典에 근원을 둔 문장’ 또는 ‘義理의 문장’만을 참다운 문장으로 규정함으로써 변려문은 주목하지 않았다. 古文이 아니면 좋은 문장이 아니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17세기 조선의 문단에서는 변려문을 전문적으로 익히기 위한 방법으로 儷文選集의 편찬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또 개인 창작의 결과를 문집에 수록하며 ‘儷文’조를 별도로 수록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 경우 관각체에 경도된 여문선집과는 달리 개인적인 성향에 따라 徐庾體와 館閣體가 모두 나타난다. 南龍翼의 「儷評」은 이러한 당시 분위기 속에서 변려문의 가치를 인정하고 본격적으로 논의한 주목되는 자료이다. 물론 당시에도 변려문의 가치를 관각체를 중심으로 한정적으 로 인정하였지만, 서유체와 관각체 두 문체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그 역사적 흐름을 파악한 것은 큰 의미를 지닌다. 任叔英이 서유체를 계승하고 李植이 관각체를 계승하였다는 언급 은 조선 변려문의 전개 과정을 설명한 것으로, 그의 뛰어난 안목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는 변려문의 기원부터 서유체가 송대 체격의 변화를 거쳐 관각체가 등장한 중국 변려 문의 전개 과정을 간략하게 기술하였다. 이어 신라 崔致遠 조선에 이르기까지 주요 작가 의 특징을 거론하였다. 특히 임숙영을 初唐四傑에 견줄만한 작가로 인정하여 조선 최고의 변려문 대가로 높였다. 남용익은 서유체를 좋아하여 그의 변려문 수련도 임숙영을 따라 궁극적으로 초당사걸에 이르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남용익은 중국과 우리의 변려문을 평 가하면서 ‘精’을 변려문의 핵심으로 파악하였다. 이것은 관각체보다 서유체에 가까운 비평 기준이다. 이것은 남용익 자신이 서유체를 좋아하였던 것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17세기 후반 조선의 문단에서 창작에 변려문을 적극 활용하는 鄭斗卿, 洪錫箕, 金得臣, 朴長 遠, 洪萬宗 등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고문에 경도된 17세기 조선 문단의 특수성으로 변려문은 많은 창작이 이루어지지 못하 였다. 그럼에도 17세기 변려문에 대한 인식과 창작은 기존 문학론에 대한 회의와 모색을 위한 과도기적 노력이라는 점에서 의미하는 바가 크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17세기 조선의 儷文選集 편찬과 유행
3. 南龍翼의 변려문 인식과 「儷評」
4. 당대 문인들의 인식과 창작
5. 맺음말
참고문헌

저자정보

  • 박용만 Park Yong-man. 충북대학교 우암연구소 전임연구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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