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Transformation Process of Manseokbo and Current Status of Commemoration Projects
초록
영어
Manseokbo, a repair facility located in Ipyeong-myeon, Jeongeup-si, Jeollabuk-do, which was the beginning of the Gobu Peasant Uprising in the late Joseon Dynasty, has historical value as a facility that pulled the first fuse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in 1894. On January 10, 1894, farmers who were angry at Jo Byeong-gap's tyranny finally attacked Gobu Gwana and destroyed Manseokbo, a symbol of exploitation and object of resentment the next day. After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Ahn Gil-soo, the governor of Gobu demolished the remaining Manseokbo in September 1898, which had been partially destroyed and left unattended to soothe public sentiment. In this historical site where Manseokbo was located after liberation, there are "Manseokbo Maintenance Monument" built in 1973 by the Gabo Donghak Revolution Memorial Project and "Manseokbo Maintenance and Purification Monument" built in 1987. On the opposite side is Yang Seong-woo's Monument to Manseokbo, which was built in 1999. Currently, if you follow the embankment road about 500m from the Manseok Maintenance Monument to Baeksan Mountain in the west, there is a Manseok Maintenance Monument built by Jeongeup-si on May 11, 2000. The ninth act here is related historical materials consistent with the historical research of the villagers that the place where the reservoir was located. Since Gumakbo mentioned in the book means nine maekibo, it is highly likely that the site of Manseokbo is here. Therefore, the controversial location of Manseokbo is more likely and valid than the location where the current Manseokbo is built than the location where the Manseokbo Maintenance Monument and the Manseokbo Purification Monument are located.
한국어
조선 후기 고부농민봉기의 발단이 된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에 있는 수리시설인 만석보(萬石洑)는 1894년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의 첫 도화선을 당긴 시설로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1893년 고부군수 조병갑은 기존의 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보(新洑)인 만석보를 축조한다고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쌓게 하고, 가을에 수세를 받아 700여 섬을 착복하는 등 온갖 탐학한 행동을 다하였다. 1894년 1월 10일, 마침내 조병갑의 학정에 분노한 농민들이 고부관아를 습격하 였고 다음날 수탈의 상징이자 원성의 대상이었던 만석보를 파괴하였다. 동학농민혁 명의 시작이 된 고부농민봉기가 일어난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후 1897년 11월에 새로 부임한 고부 군수 안길수가 민심을 달래기 위해 일부 파괴된 채로 방치되어 있던 나머지 남은 만석보를 1898년 9월에 철거하였다. 그러나 시기는 정확치 않지만 다시 보를 보수하여 일제 강점기에는 용산보라 칭하였고 실제로 그 보를 중요 수원으로 활용했다. 해방 이후 만석보가 있던 이 역사적 장소에는 갑오동학혁명기념사업회가 1973년 에 건립한 ‘만석보유지비’와 1987에 세운 ‘만석보유지정화기념비’가 세워져있다. 맞은편에는 1999년에 세운 양성우의 ‘만석보’ 시비(詩碑)가 있다. 현재 만석보유지비에서 서쪽 백산 방면으로 약 500m 정도 제방 길을 따라가면 정읍시에서 2000년 5월 11일에 건립한 ‘만석보유지’가 세워져 있다. 이곳이 아홉 번째 막은 보가 있었던 자리라는 촌로들의 고증과 일치하는 관련사료 인 「全羅道古阜民亂始初」에서 언급한 구막보(九幕洑)가 바로 아홉맥이보를 의미하므 로 만석보의 자리가 이곳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논란이 되고있는 만석보의 위치는 만석보유지비와 만석보정화기념비가 있는 자리보다는 현 만석보유지가 세워져 있는 자리가 더 유력하며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
목차
머리말
Ⅰ. 만석보의 개요 및 관련사료 검토
Ⅱ. 조선 후기 만석보의 변천과정
Ⅲ. 일제강점기의 만석보
Ⅳ. 만석보 유적지의 기념사업
Ⅴ. 만석보 유적지의 향후 정비방안
맺음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