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영어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use in-depth interviews to focus on Lee In-pyo's career in basketball life. First, he started playing basketball in his third year of Kwanghee Middle School, and his skills improved with personal training conducted every day, such as being selected as an outstanding high school player. Second, he played as a member of the national team from the 1962 Asian Games in Jakarta to the 1971 Asian Basketball Championships in Japan. Third, he joined the Korea Development Bank basketball team in 1962, joined the Marine Corps basketball team in 1963, was discharged in 1996, and returned to the Korea Development Bank basketball team, where he served as a main player until his retirement in December 1971. Fourth, For the first time in Korean basketball, 10th place with four wins at the 1969 Asian Championship, the 1970 Asian Games, and the 1970 World Championship was the best performance to this day.
한국어
이 연구는 심층면담을 사용하여 이인표의 농구 인생사 중 선수 생활 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우리나라 농구 발전사에 어떠한 의의와 가치가 있는지를 규명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첫째, 광희중 3학년 때 농구를 처음 시작하였고, 성동공고 2학년 때 고 교 우수선수에 선발되는 등 팔이 유난히 긴 신체조건과 함께 매일 같이 실시한 개인훈련으로 실력이 일취월장하였다. 둘째, 1962년 자카르타 아 시안게임을 시작으로 1971년 일본 아시아농구선수권대회까지 국가대표 로 활약하였다. 셋째, 1962년 한국산업은행 농구팀에 입사하였고, 1963년에 해병대 농구팀에 입대하여 1996년에 제대한 후, 다시 한국산업은행 농구팀에 복직하여, 1971년 12월 은퇴까지 주축선수로 활약하였다. 넷째, 1966년부터 1968년까지 미군 찰리 마콘과 제프 고스폴에게 선진농구를 지도받았던 국가대표 중 한 선수였다. 다섯째, 한국농구 최초로 1969년 방콕 아시아선수권대회와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 제패, 그리고 1970년 유고 세계선수권대회 4승으로 10위는 오늘날까지 최고의 성적으로 국가 대표 주축 맴버로서 활약하였다.
목차
Ⅰ. 서론
Ⅱ. 연구방법
Ⅲ. 이인표의 생애
Ⅳ. 돌파의 달인, 이인표의 농구 인생사
1. 농구와의 첫 만남과 성장
2. 태극마크와 해병대 농구단 입대
3. 미군 코치와 미국 전지훈련
4. 아시아 첫 제패 및 황금세대
Ⅴ. 결론
참고문헌
ABSTR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