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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으로 전래된 성리학의 변화과정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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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the Change of Neo-Confucianism in Japan

호사카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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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clarify the difference between Korean Neo Confucianism and Japanese Neo Confucianism. From the beginning of the 12th century, Zen monks introduced the Neo Confucianism of Southern Song to Japan. Seika Fujiwara, the founder of Japanese Neo Confucianism, had compromised Neo Confucianism, Yangmig theory, and Buddhism. Since the Edo period, Ansai Yamazaki has been evaluated as the most accurate scholar on Yi Toegye in Japan. What impressed Ansai Yamazaki a lot about Yi Toegye was Yi Toegye’s attitude toward Chu Hsi. Ansai Yamazaki also pointed out the limitations of Yi Toegye. He criticized Yi Toegye for not being able to interpret the origin of the universe. Ansai Yamazaki pointed out that myths published in “Kojiki” and “Nihonshoki” in Japan presented the origin of the world. Beyond Yi Toegye, Ansai Yamazaki claimed that he was the ‘first person after Chu Hsi and said that Shintoism and Japanese history could be interpreted through Neo Confucianism. He also founded Suika Shinto. His idea deviated from Neo Confucianism by expressing, “If Confucius and Mencius attack Japan, we should take them all prisoner.” Neo-Confucianism after being introduced to Japan, was Japaneseized to a large because it was difficult to escape the influence of Buddhism or Shintoism. In other words, Japanese Neo-Confucianism has turned into a Japanese-style camp logic.

한국어

본 연구에서는 조선성리학과 일본성리학의 차이점을 밝히는 데 목적을 두었다. 12세기 초부터 남송 성리학은 선종 승려들을 통해 일본으로 전달되었다. 일본성리학의 시조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의 학문은 양명학, 불교 등을 절충한 것이었다. 그의 제자 하야시 라잔(林羅山)의 성리학도 양명학적 요소가 있었다. 에도시대 이후 일본에서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霽)가 이퇴계(李退溪)를 가장 정확히 이해한 학자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가 이퇴계에게 많은 감명을 느낀 부분은 주자에 대한 이퇴계의 자세였지만 그는 이퇴계의 한계도 지적했다. 그는 이퇴계가 ‘역(易)’에 대한 해석을 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야마자키 안사이는 일본의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실린 신화가 세계의 시원과 근원을 제시했다고 주장했다. 야마자키 안사이는 이퇴계를 넘어 자신이야말로 ‘주자 이후의 제1인자’라 주장했고 신도(神道)와 일본사를 성리학으로 해석하기 시작해 스이카신도(垂加神道)를 창시했다. 그의 사상은 ‘공맹이 공격해 온다면 그들을 모두 포로로 삼아야 한다’는 표현으로 성리학에서 일탈했다. 일본으로 전래된 성리학은 불교나 신도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서 상당히 일본화하고 말았다. 환언하면 일본 성리학은 일본형 진영논리로 변해 갔다.

일본어

本論文は、朝鮮性理学と日本性理学の違いを明らかにするところに目的を置いた。12世紀初めから南宋性理学は禅宗の僧侶を通じて日本に伝わった。日本性理学の開祖藤原惺窩の性理学は、陽明学や仏教を折衷したものだった。彼の弟子である林羅山の性理学にも陽明学的要素があった。江戸時代以降、日本では山崎闇斎が李退渓を最も正確に理解した学者だったという評価を受けている。山崎闇斎が李退渓から感銘を受けた部分は、朱子に対する李退渓の姿勢だった。また山崎闇斎は、李退渓の限界も指摘した。彼は李退渓が易の解釈ができなかったと批判した。山崎闇斎は󰡔古事記󰡕と󰡔日本書紀󰡕の神話が、世界の始原と根源を提示したと指摘した。山崎闇斎は李退渓ではなく自分こそ󰡔朱子以來の第一人者󰡕と主張し、神道と日本史を性理学で解釈できるとし、垂加神道を創始した。彼の思想は「孔孟が攻撃してくるなら、彼らを皆捕虜に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表現で性理学から逸脱した。日本に伝わった性理学は、仏教や神道の影響から逃れることが難しく、かなり日本化してしまった。換言すれば、日本の性理学は日本型の陣営論理に変わってしまったのである。

목차

<要旨>
Ⅰ. 머리말
Ⅱ. 일본에서의 유교・성리학 수용
Ⅲ. 야마자키 안사이와 이퇴계
Ⅳ. 야마자키 안사이의 신유(神儒) 일치사상
Ⅴ. 맺음말
参考文献
<要旨>

저자정보

  • 호사카유지 Hosaka Yuji . 세종대학교 대양휴머니티칼리지 대우교수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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