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The funeral culture of Local Residents during the Joseon Dynasty: A Focus on the Case of Gimhae Seonji-ri
초록
영어
The Gimhae Seonji-ri archaeological site reveals around 400 tombs spanning from the Goryeo to the Joseon Dynasty. Among the 33 tombs excavated, a total of 34 skeletons were recovered. The confirmed gender distribution includes 8 males (including those presumed to be male) and 8 females (including those presumed to be female), with 18 undetermined individuals. While the gender ratio within confirmed individuals is nearly equal, the high percentage of undetermined genders complicates the overall interpretation. Regarding age, the majority of undetermined individuals exist, but among discernible cases, adulthood is most prevalent, followed by middle age. This suggests a higher mortality rate during the youth of the deceased, possibly reflecting the challenging conditions or elevated risks associated with childbirth for women during that era. Most tombs lack distinct burial items, and various burial structures such as circular mounds, rectangular mounds, and wooden coffins were identified. However, considering the evidence from other tombs within the site, the presence of diverse burial items, and consistent size and construction methods, it is inferred that the individuals buried in Seonji-ri were not of low social status. Detailed observations of skeletons with identifiable features did not reveal severe illnesses, and the overall health status of infants also seems unproblematic. The group does not appear to have engaged in strenuous physical labor. Combining insights from tomb structures and burial items, it can be suggested that the deceased were at least from the middle to upper classes in the Gimhae region. The varied forms of tombs and construction methods imply that this was not a single familial burial ground but rather a communal burial site utilized by diverse groups over an extended period. Despite the considerable distance from the capital, the adherence to Confucian and ritualistic norms indicates the presence of individuals of significant social standing in the Gimhae region. Further research, integrating regional history, is crucial to understanding the connection between these individuals and the local socio-cultural context.
한국어
김해 선지리 유적은 400여 기의 고려에서 조선시대에 걸친 분묘가 확인되었다. 분묘 중 33기의 무덤에서 총 34개체의 인골이 수습되었는데, 확인된 개체들의 성별 구성은 남성(남성으로 추정되는 개체 포함) 8개체, 여성(여성으로 추정되는 개체 포함) 8개로 판별 되었다. 불명의 개체는 18개체에 이른다. 성별이 확인된 개체 내에서는 남녀의 성비는 거 의 동률을 이루고 있지만 성별을 확인할 수 없는 개체가 전체의 53%에 이르는 점에서 유 적 전체의 양상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연령의 경우 불명의 개체가 다수 존재하 지만, 판별 가능한 개체 중에서는 성년이 가장 많으며 다음으로 숙년으로 확인되었다. 이 를 통해서 보면 본 유적의 피장자들의 청년기 사망률이 생각보다 높으며 노년기의 사망 은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남성 개체는 여성 개체에 비해 숙년에서 노년에 걸친 연령이 더 많이 확인되는데, 이는 당대의 여성이 남성과 비교하면 건강, 영양학적인 열세 에 놓여 있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임신과 출산이라는 과정에서 사망율이 높았던 상황을 반영한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골이 출토된 무덤은 대부분이 별도의 부장품이 확인되지 않았으며 매장구조도 회 곽묘, 직장묘, 목관묘 등으로 다양하게 확인된다. 다만, 유적 내에서 확인된 다른 무덤의 상황을 참고하면 다양한 부장품이 부장되고 일정한 규모와 축조 방식을 갖추고 있는 점에서 선지리의 피장자들은 신분이 낮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인골 중 비교적 상세한 관찰이 가능한 개체를 중심으로 살펴볼 때 심각한 질환은 확인되지 않았다. 유소아기의 건강 상태에도 큰 문제가 의심되지 않으며 육체적인 노동을 활발하게 하던 집단도 아니 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앞서 무덤의 부장품 및 구조를 통해서 추정한 것과 종합하여 보면 피장자들은 최소한 김해지역의 중, 상위 계층의 집단으로 볼 수 있을 것이며, 오랜 기간에 걸쳐 구릉의 남면부를 폭넓게 이용하면서 무덤을 조성해 온 것으로 보인다. 다만 무덤의 형태, 부장품이나 축조 방식에 있어서 획일적이지 않고 다양한 형태가 산포되어 있는 점에서 단일의 친족 집단이 장기간에 걸쳐 축조한 무덤이기 보다는 다양한 집단에서 공용으로 활용하던 분 묘지역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김해지역은 수도와 물리적인 거리가 상당함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성리학적 장송 문화의 규칙을 따르며, 유교 사회의 지배계급 일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고, 김해부라는 조선사회의 지역적 위계에 해당하는 인물들이 김해지역 에 거주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사람들이 김해지역을 구성하고 있다가 사 망 후에 김해읍성 주변 지역에 묘역을 형성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와 관련해서 더욱 지역사의 성과와 연계해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목차
Ⅰ. 시작하며
Ⅱ. 연구 대상
1. 조선시대의 김해지역
2. 선지리 유적 (그림 2)
Ⅲ. 선지리 유적 출토 고인골
Ⅳ. 조선시대 지방민의 장송 문화
Ⅴ. 마치며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