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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일기(鴻齋日記)』를 통해 본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기 부안 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과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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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ivities and Characteristics of Donghak Peasant Army in Buan during the Second Uprising of Donghak Peasant Revolution through Hongjae Diary

정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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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The Confucian scholars of Jeolla-do recognized Donghak as a variant of Seohak or a study of tax people, and later, during the first uprising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the peasant army occupied Gamyeong-gun and Gyeong-gun as well as Jeonju-seong, the head of Honam. It is confirmed that Ki Haeng-hyun also had a negative perception of Donghak. The second uprising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was a time when the Donghak Peasant Army in the South and the North were united in accordance with the gun decree issued by Choi Si-hyung on September 18. In "Hongjae Ilgi", it is also confirmed that during this period, Doso in Buan-eup was established in Jakcheong in the town. The Donghak Peasant Army in Buan, where Ki Haeng-hyun lived, did not actively participate from a distance during the first uprising, but participated in the second uprising following the gun decree, saying it was a large soldier to defeat the Japanese army. Kim Seok-yoon, Kim Yeo-jung, Choi Gyeong-seon, Song Hee-ok, and other Donghak masters from Jeolla-do participated in the uprising. During this period, the movements of Donghak Peasant Army in Buan and nearby areas are variously confirmed in "Hongjae Ilgi". Choi Gyeong-seon of Taein, Jeong Il-seo of Gobu, and Son Yeo-ok of Jeongeup raised the army, and Donghak Peasant Army of Buan-eup was actively engaged in two Donghak Peasant Army of Wachon and Gongchon. In response to their activities, seven villages near Buan gathered with each other to set up a Geumlan site, and Joseon Government Army and Japanese soldiers came down to suppress the Donghak Peasant Army. And from the end of October, the news of Donghak Peasant Army's defeat and victory against the police and Japanese troops is recorded in the "Hongjae Ilgi". They won greatly in Jeolla Gamyeong at the end of November, but officials not only stole the village but also took revenge by changing the name of the village. It is also confirmed that among the generals who suppressed the Donghak Peasant Army was a "revenge general" assigned to avenge the family killed by the Donghak Peasant Army. The Japanese soldiers and Joseon Government Army’s oppression of Donghak Peasant Army has intensified since December. Joseon Government Army not only arrested all the neighboring residents of the nearby area, but also continuously arrested the peasant army until the end of December. At the end of December, the Japanese and light forces that suppressed the Donghak Peasant Army in Buan almost withdrew, but some remained and remained vigilant. During this period, Confucian scholars in the region were not unconditionally ostracized, but were willing to accept Donghak if they were naturalized. It is also confirmed that the Joseon Government Army, who tried to arrest the Donghak Peasant Army that disturbed the country, was not in favor of the police force by criticizing them for disturbing the order of the village. The suppression of the Donghak Peasant Army was continuously recorded until May 1895, the following year. In particular, it is noteworthy that records have been confirmed that Hyanggyo's Confucian scholars took the lead in the arrest of Donghak Peasant Army.

한국어

전라도 유생들은 동학을 서학의 변종이나 혹세무민의 학문으로 인식하였고, 이후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 시기에 농민군이 감영군과 경군을 비롯하여 호남의 수부인 전주성까지 점령하면서 더욱 위기의식을 갖게 되었다. 기행현 역시 동학 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는 9월 18일 최시형이 내린 총기포령에 따라 남접과 북접의 동학농민군이 연합하여 활동한 시기이다. 『홍재일기』에서도 이 시기 부 안읍의 도소를 읍내의 작청(作廳)에 설치하는 등 봉기한 점이 확인된다. 기행현 이 살던 부안지역의 동학농민군은 1차 봉기 때는 거리를 두고 적극적으로 참여 하지 않았으나, 총기포령에 따른 2차 봉기에는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해 거병했 다고 밝히면서 동참하였다. 봉기에는 부안의 김석윤, 김여중, 최경선, 송희옥 등 을 비롯하여 전라도 일대 동학 접주들이 참여하였다. 이 시기 부안과 인근 지역 동학농민군들의 움직임은 『홍재일기』에서 다양하게 확인된다. 태인의 최경선, 고부의 정일서, 정읍의 손여옥이 군대를 일으켰고, 부 안읍의 동학농민군들은 와촌과 공촌의 두 접의 동학농민군들이 적극적으로 활동 하였다. 이들의 활동에 맞서 부안 인근의 7개 마을이 서로 모여 금란소(禁亂所) 를 설치하였으며, 동학농민군을 탄압하기 위해 경병(京兵)과 일본군(日本軍)이 내려왔다. 그리고 10월 말부터는 동학농민군들이 경병과 일본군과 맞서 패전하 고 승전하는 소식들이 『홍재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11월 말 전라감영에 서 크게 승리하였으나, 관원들이 고을을 도륙하였을 뿐 아니라 고을의 이름까지 바꾸는 등의 복수까지 했다. 또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던 장군 중에는 동학농민 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가족의 복수를 위해 배정된 ‘복수장군(復讎將軍)’이 있었 던 것도 확인된다. 일본군과 정부군의 동학농민군에 대한 탄압은 12월부터 더욱 거세졌다. 경군 은 인근 지역의 접주들을 모두 체포하였을 뿐 아니라, 12월 말까지 농민군을 지 속적으로 체포하였다. 12월 말에는 부안의 동학농민군을 탄압하던 일본군과 경 군이 거의 철수하였으나, 일부가 남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이 시기 지역의 유생들은 동학교인에 대해 무조건적인 배척이 아니라 동학교인이 귀화한다면 받 아들이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또한 나라를 어지럽히는 동학농민군을 체포 하려는 경군이 마을의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를 들어 질타하는 모습 등을 통 해 경군에게 호의적이지만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된다. 동학농민군에 대한 탄압 은 이듬해인 1895년 5월까지 지속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동학농민군 체포 에 향교의 유생이 앞장섰다는 기록도 확인되어 눈길을 끈다.

목차

1. 머리말
2. 2차 봉기 과정에서 동학농민군의 활동
3.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저자정보

  • 정을경 Jeong, Eul-Kyung.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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