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The Development of Kingly-Study in the Late Joseon Dynasty and King Jeongjo’s Theory on Hwanggeuk(皇極)
초록
영어
This study examines the significance of Jeongjo's theory on Hwangguk in the development of kingly-study in the late Joseon dynasty. After the Middle Joseon period, as the factional politics was realized, kingly-study developed in the direction of requiring the king to study for sainthood at the initiative of his retainers, and the ideology of co-governance by king and retainer(君臣共治) was emphasized. During the factional politics, the existence of Sallin(山林) that could counter the political authority of the king based on their academic authority was emphasized, based on the theological theory of Dotong(道統), which states that Dotong belongs to scholars. Based on the fact that they were located outside the political system represented by the king, they acted as representatives of public opinion through their academic authority. As the conflict between the factions reached a crescendo, the king was seen as the one who could end it and bring about the idealized politics of Tangpyong(蕩平). King Jeongjo followed in the footsteps of Yeongjo, but his thoughts on the role of the king was different from that of Yeongjo. From the beginning of his reign, Jeongjo expected all his retainers to play an active role in the affairs of state, regardless of factions’ legitimacy. Jeongjo positively evaluated Yeongjo's Gungeuk(建極) for ending the blood feuds between the factions, and demanded that his retainers respond in kind to establish the true way of the Hwanggeuk. The king's act of establishing the Hwanggeuk served to ensure that his retainers could participate equally in the affairs of state. In his later years, Jeongjo described his ideal form of government. “The writing of the Master of Ten Thousand Rivers and the Moon” outlines a new ideology of co-governance by king and retainer in which the conflicts between the factions were put to rest under a king-led order, and various talents were brought to the table to contribute to the state by using their talents appropriately. Through this, it can be said that Jeongjo did not completely change the nature and structure of existing kingly-study through the concept of the Hwangguk, but rather actively established the existence of the king through the concept of the Hwangguk while maintaining the framework of co-governance by king and retainer emphasized through kingly-study.
한국어
이 연구에서는 조선후기 제왕학의 발전 과정 속에서 정조의 황극론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서 고찰하였다. 조선중기 이후 사림에 의한 붕당정치가 실현되면서, 제왕학은 신하들의 주도 로 국왕에게 성인이 되기 위한 성학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으며 군신공치의 이념이 강조되었다. 붕당정치 시기에는 도통이 학자들에게 있다는 성리학적 도통론에 입각하여, 학문 적 권위를 바탕으로 국왕의 정치적 권위에 대항할 수 있는 산림이라는 존재가 부각되었다. 이 들은 국왕이 대표하는 정치체제의 바깥에 위치하였다는 특징을 바탕으로, 학문적 권위를 통해 재야 공론의 대표자로 활동하였다. 붕당 간의 갈등이 극에 달하자 이를 종식시키고 탕탕평평 한 이상적 정치로 이르게 할 수 있는 주체로서 국왕이 주목되었다. 정조는 영조의 뒤를 이어 탕평을 표방하였지만, 국왕의 역할 설정은 영조 대와는 달랐다. 정조는 즉위 초반부터 모든 신하들에게 붕당의 의리에 구애되지 않고 조정에 나아와서 활약하 기를 기대하였다. 「황극편서」에서 정조는 신하들 간의 혈전을 종식시킨 영조의 건극의 공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신하들의 호응을 요구하며 진정한 황극의 도를 이루고자 하였다. 국왕 이 황극을 세우는 행위는 신하들이 붕당의 의리에 구애되지 않고 고르게 정국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기여하는 것이었다. 정조가 말년에 지은 글인 「만천명월주인옹자서」에는 그 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정치 형태가 잘 기술되어 있다. 「만천명월주인옹자서」는 국왕이 주도하 는 질서 속에서 붕당 간의 갈등이 종식되어, 여러 인재들이 조정에 나아와서 자신의 재주를 적절하게 사용하여 국가에 기여하는 새로운 군신공치 이념이 제시된 글이라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보면 정조는 황극 개념을 통해 기존 제왕학의 성격과 구조를 완전히 변화시킨 것이 아니 라, 제왕학을 통해 강조된 군신공치라는 틀을 유지한 가운데 국왕이라는 존재를 황극 개념을 통해 적극적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목차
1. 머리말
2. 조선후기 제왕학의 발달과 변화
3. 정조의 황극론과 군주관
4.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