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甄萱 自署의 변화 과정과 그 의미

원문정보

The process of GyeonHwon’s Self-proclaimed Change and its Meaning

견훤 자서의 변화 과정과 그 의미

박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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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This article aims to explore the process of GyeonHwon’s (甄萱) self-proclaimed change and its significance. It appears that around 892, GyeonHwon began using an extensive self-proclaimed title when he was based in Mujinju (武 珍州). The title can be broadly divided into three parts. The first part, Shilla Seomyeondotong (新羅西面都統), was the initial title he adopted at that time. With this title, GyeonHwon emphasized his role in suppressing regional chaos and restoring public sentiment. The middle part of the title, particularly Hang Jeonjujasa (行全州刺史), does not appear to have been used as it was in 892. When referring to the name JeonjuJasa with the term “haeng (行),” it should be considered as reflecting the situation when GyeonHwon established the Later Backje (後百濟) in Wansanju (完山州) in 900. The last part, Hannamgungong (漢南郡開國公), is a title that indicates GyeonHwon’s intent to occupy the territory of Baekje (百濟) south of the Han River (漢江). This title is believed to have been a self-proclaimed official name along with the front part in 892. Both titles are aligned in that they include new official names not previously used and terms referring to ambiguous territories. GyeonHwon changed his previous self-proclamation by referring to himself as King Baekje (後百濟王) in the year 900. The name recognized by Later Tang (後唐) in 925 appears to be the result of this change. Since then, GyeonHwon has consistently maintained this selfdesignation and continued to be recognized for his external status as King Baekje by holding an official position received from China.

한국어

견훤이 무진주에 근거하고 自王·自署한 것은 892년부터였다. 이 자서는 크게 ① 신 라서면도통 지휘병마제치, ② 지절 도독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겸어사중승, ③ 상주 국 한남군개국공 식읍이천호 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①은 892년 당시 첫 번째로 칭한 관함으로, 견훤은 신라서면과 연칭한 도통·지휘·병마·제치를 맨 앞에 내세움으로써 그가 반역자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그 역할이 지역의 혼란을 제압하고 민심을 수습하는 것이라는 점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반면 ②는 892년 당시에 그대로 사용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行守의 유래가 임시직을 가리키는 것이라 해도 항상 실직 앞에 붙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견훤이 실제로 전주에 도읍하여 이를 중심지로 삼고 있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 행전주자사를 포함한 이 관함은 견훤이 900년 완산주 에 도읍하였을 당시의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③의 한남군개국공은 한강 남쪽 백제 영역을 영유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은 군공호로, 892년 당시 신라서면도 통과 함께 자서된 관명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기존에 잘 사용하지 않던 새로운 관명과 두루뭉술한 영역을 가리키는 용어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라서면도통과 일맥상통 하는 면이 있다. 견훤은 900년 후백제왕을 지칭하면서 이전의 자서에 변화를 주었으며, 925년 후당으로부터 인정받은 관함은 900년 당시 자서를 변화시킨 결과로 보인다. 견 훤은 이후 이 자서를 꾸준히 유지하면서 중국으로부터 받은 검교태보, 검교태부, 검교태 위 겸시중 판백제군사 등을 겸하여 후백제왕으로서의 대외적인 위상을 지속적으로 인정 받았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견훤의 흥기와 892년 ‘新羅西面都統’ 自署
Ⅲ. ‘行全州刺史’의 의미와 900년 견훤의 稱王
Ⅳ. 吳越·後唐 교류와 自署·冊封號의 변화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저자정보

  • 박수정 Park, Soo Jeong. 동서대학교 민석교양대학 조교수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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