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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후반 한인들의 북만주 이주와 벼농사 경영 및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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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location of Koreans to North Manchuria in the late 1920s and the management and life of rice farming

강수종

숭실사학회 숭실사학 제51집 2023.12 pp.12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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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The distribution of the Korean population in North Manchuria can be divided intoapproximately five regions. First, it is the area that connects Harbin and Suifenhe(綏芬河), and is the most densely populated area in Bukmanju. The second is theMokdan River(牧丹江), Dongning(東寧), and Suifenhe(綏芬河) areas. The third isthe area such as Hulin(虎林), and Mishan(密山), which were bordering China andthe Soviet Union. Fourth, there was an area near the Songhua River, which was theboundary between Jilin and Heilongjiang provinces at that time. Lastly, it is thearea inside Heilongjiang Province. It is difficult for Koreans living in these areas tocompare them to the Gando area and the southern Manchuria area of LiaoningProvince in terms of the time of settlement and the number of population, but it canbe confirmed that the residential area of Koreans was formed around the low-lyingareas of the railroad and river. Rice farming in North Manchuria is believed to have started around 1916 in thearea near the sea Hailin and Yeonggotap in Ningan. The advantage was that thewater supply farming in North Manchuria, which started in this way, required lesslabor in weeding than in the process of cultivation in Joseon, and that there was nosignificant difference from Changchun in climatic requirements such as averagetemperature and precipitation from sowing to harvest, which is the most importantperiod in water supply management, from May to September. In addition, there wasonly a need to prepare for the early frost, but this was a problem solved throughthe use of varieties that could be harvested quickly. And it can be said thatKoreans accounted for a very large number of those engaged in the water supplybusiness, so they were in an advantageous position to be virtually monopolized byKoreans. However, the economic situation of Koreans who ran water farming in North Manchuria was not optimistic. In fact, regardless of the prospects of water farming,the poor peasants occupied the majority of Koreans living in North Manchuria. Most of the migrant Koreans had no choice but to bear tenanting contracts againstthem in the absence of basic assets to live their lives. In addition to the simpleburden of tenanting fees, the problem of intermediate landlords in addition to thedirect relationship between landlords and Korean tenant farmers was a factor thatcaused chronic deficits in Koreans. Around 1930, the policies to establish Koreans in Jilin and Heilongjiang provincesalso acted as a great threat to the lives of Koreans. In Harbin, the main graintrading market in North Manchuria, despite the overall decline in grain pricesaround 1930, the price per unit weight of rice was the highest even until 1931. Therefore, despite the decline in prices around 1930, the benefits of water supplymanagement and rice production compared to other grains such as soybeans andmillet were clear. In addition, despite the monopoly position of Koreans in watersupply management in North Manchuria, the governments of Jilin and Heilongjiangimplemented a strong policy to expel Koreans. The cause of this was the view oflinking the migration of Koreans and Japanese invasion of Korea by the Northeastgovernment. In the late 1920s, most migrant Koreans suffered chronic deficits in the Koreancommunity in North Manchuria, making it difficult to live economically, and thepolicy of deporting Koreans from both Jilin and Heilongjiang provinces wasintensifying. First of all, in relation to the economic life of Koreans, the tenantingcontracts of Koreans in North Manchuria in the late 1920s were structurally in aform that had no choice but to repeat the deficit. In response, Koreans in NorthManchuria tried to overcome the structural problems of tenanting contracts throughthe acquisition of land and joint farm management, or by lowering tenanting feesand acquiring tenanting rights. In addition, it seems that the government respondedto the policy of deporting Koreans from the northeast warlords throughnaturalization movements along with the establishment of organizations such asresident associations. In particular, nationalist Koreans sought defense measuresagainst the situation of pressuring Koreans in the name of the oppression of thecommunist movement, and organized community meetings in each district tocooperate with the Chinese government constitution or submit petitions to the current government.

한국어

북만주 한인 인구 분포는 대략 5개 지역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먼저 첫 번째로 하얼빈과 綏芬河로 이어지는 賓綏線 지역으로 북만주에서 한인이 가장 밀집하여 거주하는 지역이다. 두 번째로 목단강, 동녕현, 수분하 지역이다. 세 번째로 중국과 소련 접경 지역이었던요하, 호림, 밀산 등의 지역이다. 네 번째로 당시 길림성과 흑룡강성의 경계였던 송화강 인근 지역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흑룡강성 내부 지역이다. 이들 지역의 거주 한인들은 정착시기와 인구수에 있어 간도 지역과 요녕성 일대의 남만 지역에 비하기 어려우나, 철도와강변의 저지대를 중심으로 한인 거주 지역을 형성하였다는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북만주 수전농업은 대략 1916년경 영안현 해림과 영고탑 인근 지역에서 시작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렇게 시작한 북만주의 수전 농업은 조선 내에서의 경작 과정에 비해 제초 작업에서 노동력이 덜 필요했고, 수전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인 파종 이후 추수까지의 기간 즉 5월부터 9월까지의 평균기온, 강수량 등 기후적 요건의 경우 장춘과는큰 차이가 없었다는 이점이 있었다. 이외에 이른 서리에 대비할 필요성만이 있었으나, 이는빠른 수확이 가능한 품종의 사용을 통해 해결되는 문제였다. 그리고 수전 사업에 종사하는이들 역시 한인이 매우 많은 수를 차지하여 사실상 한인의 독점사업이라고 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북만주에서 수전 농업을 경영한 한인의 경제적 상황이 낙관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수전 농업의 유망함과 관계없이 북만주 거주 한국인 중 빈농 계층이 다수를점하고 있었다. 이주 한인의 대부분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기초 재산이 없는 상황에서자신들에게 불리한 소작계약을 감수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단순한 소작료의 부담뿐만 아니라 지주와 한인 소작인과의 직접적인 관계 이외에도 중간 지주로 인한 문제도 한인의 만성적인 적자를 야기하는 요인이었다. 1930년을 전후한 시기 길림성과 흑룡강성의 한인 구축 정책 역시 한인들의 생활에 큰위협으로 작용하였다. 북만주의 주요 곡물 거래시장이었던 하얼빈에서 1930년을 전후한 시기의 전체적인 곡물 가격 하락에도 불구하고 단위 무게당 가격은 1931년에 이르러서도 쌀이 가장 고가였다. 따라서 1930년을 전후한 시기 가격 하락에도 불구하고 대두, 조와 같은다른 곡물에 비한 수전 경영과 쌀 생산이 가져오는 이익은 분명하였다. 이와 함께 북만주 의 수전 경영에 있어 한인이 가지는 독점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길림, 흑룡강성의 정부는강경한 한인 구축정책을 실시하였다. 이것의 원인은 동북 정부가 가지고 있던 한인의 이주와 일본의 침략을 연관시키는 관점때문이었다. 1920년대 후반 북만주 한인 사회에는 이주 한인의 대부분이 만성적인 적자를 보고 있어경제적 생활이 어려웠으며, 아울러 길림·흑룡강성 두 성의 한인 구축 정책도 심화되는 상황이었다. 먼저 한인의 경제상활과 관련해서 1920년대 후반 북만주의 한인들의 소작계약은구조적으로 적자를 반복할 수 밖에 없는 형태였다. 이에 대한 북만주 한인들은 토지의 취득과 공동 농장 경영을 통해 소작 계약의 구조적 문제에서 벗어나거나, 소작료 인하, 소작권의 획득을 통해 문제를 타개하고자 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동북 군벌의 한인 구축정책에대해서는 주민회 등의 단체 설립, 자치운동과 더불어 귀화 운동을 통해 대응했던 것으로보인다. 특히 민족주의 계열의 한인들은 공산주의 운동의 탄압이라는 명분으로 한인들을압박하는 상황에 대해 자위책을 강구하였고 이에 각 지에서 주민회를 조직하여 중국 관헌들에 협조하거나 현 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목차

Ⅰ. 머리말
Ⅱ. 북만주의 한인 인구 분포와 지역 범위
Ⅲ. 한인의 경제 상황과 사회경제 지위
Ⅳ. 북만주 한인의 인식과 단체별 대응
Ⅴ.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저자정보

  • 강수종 Kang Su-Jong.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학예연구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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