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麗末鮮初 중국 북방문화의 유입과 剝地粉青沙器 편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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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Influx of North Chinese Culture in Late Goryeo and Early Joseon period and a chronological study of Buncheong Ware with Sgraffito

려말선초 중국 북방문화의 유입과 박지분청사기 편년연구

나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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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There have been lots of studies on Buncheong Ware, but there weren’t many studies on Buncheong Ware with Sgraffito. Previous studies on Buncheong Ware with Sgraffito have just suggested that it was designed and advanced from Inlaid on Face, and both Incised and Sgraffito were linked with Cizhou-yao(磁州窯) of China. After comparing Sgraffito of China with that of Korea, Sgraffito, used in the 15th century of Joseon Dynasty, is similar to that in inner Mongolia(內蒙古) and in Liaoning province(遼寧省), and it is also found that both the materials of patterns and the expression have the similarity with the ware in Liao(遼), Jin(金), and Western Xia(西夏) of China. However, given the difference in usage time of 200 to 300 years, it can be said that Buncheong Ware with Sgraffito was not directly influenced by Liao(遼), Jin(金), and Western Xia(西夏). but influenced by the remaining Yuan Dynasty ceramics cultures. This relationship between Buncheong Ware with Sgraffito and the Northern Chinese ceramic was attributed to the trade with northern China and the influx of naturalized people in the Late Goryeo and Early Joseon Periods, which led to the introduction of procelain and a series of social changes. It was argued that Buncheong Ware with Sgraffito and Inlaid Buncheong were produced at the same time due to the same pattern and model of them. There were many social changes in Joseon during the during the late Yuan and early Ming periods. In addition, Buncheong Ware with Sgraffito is an important porcelain that can give a glimpse of these social changes from a ceramic history perspective, so it can be said to be meaningful in this respect.

한국어

분청사기에 관해서는 선학들의 많은 연구가 있었다. 그러나, 박지분청은 면 상감기법으로부터고안 발전된 것이라는 견해와 조화기법과 박지기법이 중국 자주요와 연관성이 있을 것이라는 언급만이 있었다. 박지기법을 중국 척화기법과 비교해 본 결과 박지기법은 기법상 내몽고와 요녕지역의 장식기법과 유사하였다. 그리고, 문양의 소재와 표현양식은 요대, 금대, 서하 자기와 유사하였다. 그러나, 200-300여 년이라는 사용 시간의 차이로 볼 때 박지분청은 요대, 금대, 서하 자기의 직접적 영향이 아닌 이들 자기문화의 영향이 남아있는 원대 자기와 그 연관성이 있음을 이야기하였다. 이러한, 박지분청과 중국 북방계 자기의 연관성은 여말선초 시기 중국 북방지역과의 무역과 귀화인의유입에 따른 사회적 변화와 새로운 문물의 유입에 의한 영향으로 보았다. 이외에도, 박지분청이 상감분청과 기종과 문양을 공유하고 있어 비슷한 시기에 제작되었음을 주장하였다. 중국 元明 교체기 조선에는 많은 사회적 변화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박지분청사기는 도자사적 관점에서 이들 사회변화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기이며 또 이러한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고할 수 있다.

목차

I. 머리말
II. 剝地技法의 개념과 中國 剔花技法과의 관계
III. 剝地粉靑沙器와 象嵌粉靑沙器 비교
IV. 중국 북방문화의 유입과 剝地粉靑沙器의 편년
V. 맺음말
국문초록
Abstract
참고문헌

저자정보

  • 나상철 Na Sangcheol . 충북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강사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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