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영어
Korean prisoner of war guards mobilized during World War II accounted for the majority of those punished by the Allied Forces as BC class war criminals after the war, drawing attention for their complex status as both victims and perpetrators among Japanese and Allied prisoners of war. Regarding the BC class war criminals who were former POW guards, research and reports revealed the coercive nature of mobilization hidden behind the form of recruitment and the status of Korean POW guards at the bottom of the hierarchical organization within the Japanese military. In this paper, by expanding the subject from BC class war criminals to all POW guards, analyzing the contents of the list of men in the Ayutthaya concentration camp, the content of which is unknown, and comparing it with 『緬甸泰俘虜收 容所 留守名簿』,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advance the understanding of the overall situation of Korean POW guards who were mobilized to Thailand. The focus here is on the process of mobilizing Korean POW guards in Thailand and the control of Japanese forces. Through the analysis of recruitment process and the domicile of origin, it was found that the recruitment of POW guards conducted in May 1942 was carried out such as vertical allocation of personnel from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to Do(道)-BuGunDo(府郡島). In addition, through the analysis of character types, I would like to point out the aspect of the division and control of Korean prisoner guards by Japanese imperialism using the positions (ranks) of Gowon(雇員) and Yongin(傭人).
한국어
이 글은 아유타야수용소 입소자 명단을 기초 자료로 하여, 일제의 타 이 연합군 포로수용소 한국인 동원 실태와 특성을 분석한 것이다. 아유 타야수용소는 1945년 9월 말에서 10월 초 사이에 설립되어, 방콕과 인 근 지역의 포로감시원과 군인, 군‘위안부’, 상인과 기자 등 천여 명을 수 용하였다. 수용소 입소자의 대다수를 차지한 것은 포로감시원들로, 이 들은 8월 19일 방콕에서 재태고려인회를 조직하고 대표를 선출하여 식 량 확보, 귀환을 위한 연합군과의 교섭에 나섰다. 포로감시원들은 일본 군의 최 저변에 위치해 차별받고 자주 폭행당한 그들의 열악한 처지를 설명했지만, 연합군은 한국인 포로감시원들이 연합군 포로를 학대하고 불필요하게 고문한 전범(용의자)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수용소 입소자 중 93명이 1945년 1월 1일 현재 타이포로수용소 포로 감시원으로 『유수명부』에 등재되어 있고, 그 중 28명은 한국 정부의 강제동원피해자(목록)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입소자 명단 과 『유수명부』 기재 포로감시원들은 출생연도, 본적지, 역종 비중에 서 동일한 양상을 보였다. 출생연도로 파악한 연령은 80% 전후의 20대 와 그 나머지 30대의 이원 구성으로, 소수이지만 40,50대가 포함된 수용 소 입소 남성 전체와는 차이가 있었다. 역종은 95% 내외의 용인과 4∽ 5%의 고원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본적지는 전남북이 1, 2위를 차지하 고, 경남북과 충남이 3-5위 안에 드는 동일한 양상을 보였다. 포로감시 원들의 본적지와 도별 남성 인구 비율, 일본어 해독률 사이에는 상호 관련성을 찾기 어려웠던 반면, 총독부가 실시한 노무조사결과 중 출가 및 전업 희망자 수와 높은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간 피해자들의 구술에 근거하여 포로감시원 모집 시 지역별 할당 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 왔는데, 본고에서는 도와 부의 모집 정원이 있 었으며 이를 달성하기 위해 사전회의를 소집했다는 당시 신문 보도에 주목하여, 기사에 언급된 모집 정원은 총독부와 도 등이 관할 도와 부군 도에 할당한 모집 인원이며, 인원 할당의 기준은 노무조사결과의 출가 희망자 수일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하였다. 총독부에서 도, 부군도로 이 어지는 수직적 인원 할당은 포로감시원 동원의 강제성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요소의 하나이다. 한편 수용소 배치 시 모두 용인이었던 포로감시원 중 5% 내외의 극히 소수가 1945년 2차례에 걸쳐 고원이 되었다. 고원이 되면 판임관 대우로 의 임용 가능성이 있고 급료도 증가했는데, 일본군은 이러한 일부 포로감 시원의 고원 승격으로 한국인 포로감시원들의 불만을 달래는 한편, 일제 에 대한 충성심을 유발하는 이른바 분할 통제를 도모했다고 할 수 있다.
목차
Ⅱ. 아유타야수용소 설치와 입소자 명단 작성
Ⅲ. 아유타야수용소 입소자의 실태
Ⅳ. 타이 포로감시원의 동원 및 통제 상 특징
Ⅴ. 맺음말
부록
참고문헌
국문요약
Abstr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