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A Study on The Gyeomdaeje for Yeonryesongsa(Japanese envoys in one year) and Diplomatic Implications in The Late Joseon Dynasty
초록
영어
This study confirmed the process and results of the implementation of the Yeonryesongsa Gyeumdae system between Korea-Japan relations in 1636, and the meaning of Gyeumdae system. Research on Gyeumdae system was conducted mainly on the 'King's letter Rewrite Case', and only the results of achieving the Yeonryesongsa(Japanese envoys in one year) Gyeumdae system were highlighted. Although the diplomatic significance of the dispatch of the Tongsinsa was great, that aspect was overlooked. Negotiations on Yanagawa Ikken and Gyeumdae system resulted in the reorganization of the Lee Jeong-am Rotation System and Tongsinsa dispatch. This association can have several meanings as follows. First, the burden of entertaining Japanese envoys in Joseon was greatly reduced with the implementation of the double-age system. As a result of the implementation of the concurrent system, not only the number of Segyeonseon to entertain the Japanese envoys decreased, but also the annual entertainment cost of 468 seats was reduced. Second, the 'Doseogyodae' regulation for 'Sudoseoin' among the annual litigation was also revised. Third, the trade with Tsushima conducted in Waegwan was completely separated from the diplomatic mission of the envoys, and at the same time, the Daegwan was in charge, and the payment system was also changed. The implementation of the concurrent system for annual litigation clearly shows how the system for entertaining Japanese envoys was revised under the establishment of diplomatic relations with the superiority of Joseon. It also shows the efforts of the diplomats of the two countries for peaceful negotiations, who did not want to experience the horrors of war again. In this respect, the negotiation and implementation of the Gyeomdaeje system can be seen as the starting point of the modifier “peaceful fellowship relationship” that expresses Korea-Japan relations from the end of the 17th century.
한국어
본 연구는 조선후기 한일관계에서 대표적인 일본사신 접대 규정인 연례송사 겸대제 가 시행되는 과정과 결과, 그리고 겸대제 시행의 의미에 대해 확인하였다. 국서개작사건[柳川一件]의 발생과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조선 측에서는 겸대제 시행과 연례송사에 대한 접대 부담 경감, 일본 측에서는 이정암윤번제가 실시되었다. 동 시에 양국의 외교 사행인 통신사 파견 및 차왜 파견의 재정비라는 결과를 낳았다. 이처럼 겸대제의 시행은 임진전쟁 후 조선과 일본의 국교재개 과정에서 발생한 국서개작사건의 결과로서만 언급되었을 뿐 겸대제 자체에 대해서는 간과되었다. 겸대제의 시행은 조선 측에 접대 부담을 상당히 경감시켜 주었다. 겸대제 교섭 과정 에 대해서 기존 연구에서는 증정교린지등의 내용을 인용하여 1635년 홍희남과 최의 길 일행이 마상재를 공연할 목적으로 에도로 향하면서 대마도주의 변호를 해준 공으로 이루어낸 결과물로 인식했다. 즉 1635년부터 이미 교섭이 진행된 것으로 인식한 것이다. 하지만 1635년 겸대 교섭은 대마도주와 야나가와 시게오키의 소송으로 인해 일시적으 로 파견이 중지되었던 연례송사가 한꺼번에 건너오는 것을 막고자 이루어진 겸대교섭 이었다. 세선정탈등록에 의하면 접대할 연례송사 세견선의 선척 수를 아예 줄이는 겸 대제 시행 교섭은 1636년에 가서야 이루어졌고, 시행 규정은 1637년 5월에 완전히 정비 되었다. 겸대제 시행 결과 접대할 세견 선척수가 감소한 것은 물론이고 연간 468여 석에 달하 는 접대 비용도 경감되었다. 또한 연례송사 중 수도서인(受圖書人) 도서교대(圖書交代) 규정도 정비되었으며, 구청(求請)을 위한 세견선이 정해진 기한을 넘어 체류할 시에는 일공(日供) 등을 지급하지 않는 규정도 마련되었다. 왜관에서 행해지는 대마도와의 교역 도 사신들의 외교임무와 완전히 분리되는 동시에 대관(代官)이 담당하는 것으로 변경되 었으며, 결제시스템도 변경되었다. 연례송사에 대한 겸대제 시행은 조선 우위의 외교관계 확립 하에서 일본사신 접대제 도 개정이 이루어진 모습을 잘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다시 전쟁이라는 참상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던 양국 외교담당자들의 평화적인 관계를 위한 교섭 노력도 보여준다. 이런 점 에서 겸대제 교섭과 시행은 17세기 말부터 조일관계를 표현하는 ‘평화적 교린관계’라는 수식어의 시작점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목차
Ⅰ. 서론
Ⅱ. 연례송사 겸대제 교섭
Ⅲ. 겸대제 시행 결과와 의미
Ⅳ. 결론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