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영어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amine the situation of the Soongsil University that actively participated in the April Democratic revolution to see how the university society was participating in the revolution at the time and how it recognized and tried to respond to social problems after the revoluyion. So, this paper aims to provide an opportunity to approach specific examples of university society and perception of society that particiapted in the April Democratic revolution in detail through the case of Soongsil university. First, the participation of Soongsil University students in the April Revolution began in connection with the campaign to win fair elections, and activity externally linked to the Democratic Party. And also after April 19, they participated in the “April Revolution student countermeasures committee” and particiapted in the protests led by members of the countermeasures committee at the Hanyang University on the 22th and 24th. Second, Some of the student council officials who participated in the demostration contacted other universities to conduct activities to maintain order and security as the police fled after President Rhee’s resignation. Third, The perception of the revolution by the members of Soongsil university was the April revolution was the first civil revolution in Korean history, and there was a moment that young people became patriotic. In addition, students were strongly dissatisfied with sluggish social reform of the Democratic Korean Government of the 1960s. And they strongly felt the need to participate in reality. However, over time, public opinion in the school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the revolution, but was conducting critical discussions on various problems created by the leading forces of the movement in the democratization of academies and the New-Life movement. In addition, it seems that he expressed strong opposition to the theory of neutralization and unification on the premise that he had no choice but to distrust the communists.
한국어
이 논문은 4·19민주혁명의 전개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숭실대학의 상황을 검토해 봄으로써 당시 대학사회가 어떻게 4·19민주혁명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혁명 이후의 사회문 제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대응해 가고자 했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는 목적으로 작성 되었다. 따라서 본고는 4·19민주혁명에 대한 대학사회의 참여와 현실 인식의 구체적인 상 황을 숭실대학의 경우를 통해 보다 세밀하게 접근 해보는 기회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첫째, 숭실대학교 학생들의 4·19민주혁명 참여는 외부적으로는 민주당과 연계된 공명선 거 쟁취를 위한 선거운동과 관련을 맺으면서 시작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4·19 이 후에는 4·19학생대책위원에 참여하여 22일과 24일 한양대학교에서 대책위원회 구성원들이 주도한 시위에 참여하였다. 둘째, 시위에 참여했던 학생회 간부들 중에는 이승만대통령 하야 이후 경찰의 도피로 치 안부재의 혼란상황 야기되자 다른 대학과 연합하여 치안본부를 점거한 후 질서유지와 치 안유지에 협조를 당부하는 선전·홍보활동을 전개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한 것으로 나타나 고 있다. 이 과정에서 숭실대학의 학생들은 치안본부의 질서유지를 담당하였다. 이밖에 숭 실대학의 구성원들을 4·19義擧學生對策委員會, 四月革命負傷學生同志會, 4·19위령탑 건 립위원회에서 활동하였으며, 신생활운동과 7·29 總選擧啓蒙을 위한 하기유세대, 학생계몽 대에 참여하였다. 이밖에 학생회 종교부에서는 농촌계몽을 위한 전도활동을 전개했던 것으 로 보인다. 셋째, 4·19민주혁명에 대한 학내의 구성원들의 인식은 4·19혁명이 우리 역사상 처음 가 져본 시민혁명이며, 젊은이들이 애국하는 모멘트가 마련되었다고 하고 있었다. 또한 학생 들은 민주당 정권 지지부진한 사회개혁에 강한 불만을 가지면서 현실참여의 필요성을 강 하게 느끼는 태도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학내의 여론은 4·19민주 혁명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학원민주화와 신생활운동에서 운동의 주도세력들에 의해 야기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점에 대해 비판적 논의를 전개하고 있었다. 또한 중립화 통 일론에 대해서는 공산주의자들을 불신할 수밖에 없다는 전제 하에 강력한 반대의견을 나 타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목차
Ⅱ. 학생들의 4·19민주혁명 참여와 학내 상황
Ⅲ. 김창섭의 순국과 추모비의 건립
Ⅳ. 4·19민주혁명 이후 학내의 현실인식
Ⅴ.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키워드
- 4·19민주혁명
- 숭실대학교
- 김창섭
- 지정달
- 조병옥
- 김성락
- 公明選擧爭取全國大學生共 同鬪爭委員會
- 4·19학생대책위원회
- 四月革命負傷學生同志會
- 신생활운동
- the April Revolution
- Soongsil university
- Kim Chan-Seop
- Ji Jumg-dal
- Chough Pyung-Ok
- Kim sung-Rak
- National University Student Joint Struggle Committee to Fight for Fair Election
- April Revolution student countermeasures committee
- April Revolution Wounded Students' Comrades
- New-Life mov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