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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조선 문인과 일본 남화가(南畫家)의 교유, 그 환경과 조건

원문정보

Circumstances and conditions of companionship between Joseon literati and Japanese Nanga painters in the 18th century

김현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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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Through four-time dispatches of Tongsinsa(diplomatic envoy) during the eighteenth century, Joseon literati developed their awareness of Japan, encountering the external environment based on their own ideology. Firstly, the envoys led by the Soron faction(少論) or their party in 1711 and in 1719 attempted to perceive Japan by relativization and had a tendency of Domunbulli(Tao and Literature is independent). Some of them even formed a sympathy with Sorai School. However, diplomatic environments during the time of those two dispatches were completely different. The circumstances were inevitable condition for Joseon literati to associate with Nanga painters. While Gion Nankai(祇園南海) and Hattori Nankaku(服部南郭) could be referred to this condition, Joseon literati had a companionship with Nankai. Unlike previous dispatches, the envoys directed by the Noron faction(老論) and assisted by Soron faction who belonged to Measa(梅社, gathering for plum blossom poetry) in 1748 mainly focused on being aware of Japan from the perspective of Neo-Confucianism, which made their awareness much more negative. The field of Kogaku(古學), in particular, was intensely criticized. Joseon literati might hold the position for Jaedo Theory(Theory of literature as the vehicle of the way) or a tendency of Domunbulli as per their categories, while they would appreciate Japanese paintings with a viewpoint of literary paintings. This consideration and artistic theory had made Joseon literati not to associate with Yanagisawa Kien (柳沢淇園) who was related to Sorai school. However, it is confirmed that they had met Ikeno Taiga(池大雅) who showed inexplicit ideological inclination. The dispatch of envoys in the year of 1763 led by Noron faction marked a significant turning point in artistic exchange between Joseon and Japan. Joseon literati from the dispatch identified Japan with Sozhonghua(Little Sinocntrism) and Jonjudaeui Study(The cardinal principle revering the Zhou) as well as Neo-Confucianism. They were negative to Kogaku. In addition, most of them were Nakron School involving with Kim Chang-hyeop brothers. They perceived Japan with a relativist view based on the argument of the sameness between human nature and material nature. Among them, as Won Jung-geo and Seong Dae-jung mostly claimed Jaedo Theory while having a tendency of Domunbulli, they maintained a positive perspective toward Nanga paintings. As a result, Kenkado-Ajip-Do(Kenkadō gashūzu, 蒹葭堂雅集圖) which Seong asked Kimura Kenkado to paint showed some tendency of Joseon paintings. In 1776, two years after the envoy returned to Joseon, a letter was delivered to Nam Ok, which had never been seen or done before between the two countries. Lastly, their performance and way of thinking had a substantial impact on Bukhak Schoolers including Hong Dae-yong to form their awareness of Japan.

한국어

18세기 통신사행에 참여한 조선 문인은 자신들의 사상에 기초 하여 일본 인식을 보여주었다. 우선 신묘통신사행(1711)과 기해통 신사행(1719)을 이끈 소론과 북인계 남인 관료는 일본을 상대화 시켜 인식하려고 했으며, 도문분리(道文分離) 경향을 보여주었다. 특히 일부는 소라이학파[徂徠學派]와 공감대를 형성하기까지 했 다. 다만 두 사행이 이루어질 당시 외교환경은 차이가 났다. 그래 서 조선 문인은 신묘사행 때 남화가 중에 주자학을 따른 기온 난 카이[祇園南海]와 교유하였다. 반면 무진통신사행(1748)은 노론이 주도하고 매사(梅社) 동인 에 속한 소론 등이 가세하였으므로 주자학의 관점으로 일본을 파 악하려는 움직임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므로 일본 인식은 이전 사행보다 좀 더 부정적이다. 또한 당시 사행한 관료는 부류에 따 라 재도론(載道論)과 도문분리적인 경향을 가졌을 것이며, 문인화 관점으로 일본회화를 바라보았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 문인과 사 상적 성향이 두드러지지 않은 이케노 타이가[池大雅]의 만남만이 확인된다. 계미통신사행(1763)은 한일 회화교류의 중요한 전환점이다. 사 행을 이끈 조선 문인은 주로 노론이며, 나머지 문인들도 대부분 노론 낙론계인 김창협 형제와 관련되어 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주자학의 시선으로 일본을 평가하였으며, 특히 고학(古學)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러면서도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에 근거한 상대 주의 관점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재도론(載道論)을 주장하는 가운 데 일부 도문분리적인 경향을 가졌다. 이는 성대중이 키무라 켄카 도[木村蒹葭堂]에게 <겸가당아집도(蒹葭堂雅集圖)>를 부탁하는 교 유가 일어나게 했다. 이 교유는 훗날 친교로 이어졌다.

일본어

18世紀の通信使行では、朝鮮の文人は自分たちの思想に基づいて日本 に対する認識を示した。まず、辛卯通信使行(1711年)と己亥通信使行 (1719年)を率いた小論と北人界南人の官僚たちは、日本を対象化して認識 しようとし、道文分離の傾向を示した。特に、その一部は徂徠学派と共感の 基盤を形成するまでに至りました。ただし、これら二つの使節団が行われた時 の外交環境は異なりました。そのため、朝鮮の文人たちは辛卯使行の際 に、南画家の中で朱子学を追求した祇園南海と交流しました。 一方、戊辰通信使行(1748)は老論が主導し、梅社の同人に属する小論 などが参加したため、朱子学の視点から日本を理解しようとする動きが主流と なりました。そのため、日本に対する認識は以前の使節団よりも少し否定的な ものとなりました。また、当時の使節団に参加した官僚たちは主に載道論と道 文分離的な傾向の立場を持っていたでしょうし、文人画の視点から日本絵画 を見ていました。このような理由から、朝鮮の文人と思想的性向が顕著でな い池大雅の出会いだけが確認される。 癸未通信使行(1763)は日韓絵画交流の重要な転換点である。使行を導 いた朝鮮の文人は主に老論であり、ほかの文人たちも大部分の老論落論界 である金昌協兄弟と関連している。彼らは基本的に日本人を朱子学の観点 で評価し、特に古学に対して否定的だった。それと同時に、人物性同論に 基づく相対主義的な観点を持っていました。そして載道論を主張する中で、 一部の道文分離的な傾向を持った。これは、成大中が木村蒹葭堂に<蒹葭堂雅集図>の製作を依頼する交流が生じる原因となりました。この交流は 後に親交につながりました。

목차

국문초록
1. 사상과 예술의 관계
2. 신묘ㆍ기해사행(1711·1719) 속의 상대주의
3. 노론과 매사(梅社) 동인의 등장, 무진사행(1748)
4. 한일회화교류의 전환, 계미통신사행(1763)
5. 맺음말
참고문헌
日文抄錄
Abstract

저자정보

  • 김현권 Kim, Hyun-kwon. 대구간송미술관 개관준비단 학예연구실장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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