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영어
As for the two matters that were not examined enough about Kim-Gu(金 坵)'s diplomatic activities with Mongol in the paper, an explanation was tried. First, his activities as an ambassador with Mongol were investigated in many aspects, and the following conclusions were drawn. He was dispatched to Mongol as an envoy in April in the 27th year of King Gojong(高宗)'s reign, by which the third invasion into Goryeo by Mongol had ended and when the two countries were seeking diplomatic compromise, met with Ögedei Qa’an at a temporary palace near Karakorum, and returned to Gangdo(江都) in December or in January next year(1241). The ambassador group negotiated with the Mongol ruling class, and partly contributed to the diplomatic outcome of replacing the demand audience of Goryeo king with the dispatch of turqaq(禿魯花). Next, the letters that Kim-Gu sent to Janghaksa(張學士) and Wanghaksa(王學士) of Mongol were analyzed. As a result Janghaksa was believed to be Jang-Mungyum(張文謙), who consistently did his best to politically practice Confucian teachings while closely serving Qubilai before and after the accession. And it was proved that the descriptions in Jipojip(止 浦集) regarding Wanghaksa as Wang-Ak(王鶚) corresponded with the fact.
한국어
13세기 고려는 초강대국 몽골을 상대로 왕조 체제와 정치·문화적 자주성 을 보전하기 위해 뛰어난 외교 역량을 필요로 했다. 김구는 원종대 활발한 문한외교를 통해 몽골과 화친을 맺고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따라서 그의 외교활동은 고려의 외교적 역량, 성과를 올바르게 규명하는 데 중요한 연구주제가 될 수 있다. 따라서 국내외에서 관련 연구가 꾸준히 진행 되었다. 그러나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작지 않다. 이에 본고에서 고종대 그의 대몽 사행을 고찰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했다. 그는 몽골의 3차 고려 침입이 종료되고 양국이 외교적 타협점을 모색하던 고종 27년(1240) 4월 서장관 신분으로 몽골에 파견되어 카라코룸 근처 행궁에서 우구데이를 접견 하고 12월이나 이듬해(1241) 1월 강도로 귀환했다. 사신단은 몽골 지배층과 교섭하여 고려에 대한 국왕 친조 요구를 투르칵 파견으로 대체하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는 데 일정 부분 기여했다. 다음 그가 몽골의 장학사, 왕학사에게 보낸 서한을 분석하여 장학사를 즉위 전후 쿠빌라이 측근에서 일관되게 유학 적 가르침의 정치적 실천에 진력한 장문겸으로 추정하고, 왕학사를 왕악으로 간주한 『지포집』의 서술이 사실에 부합함을 논증했다. 본고가 김구의 외교활 동을 제대로 복원하고 그 성과, 의미를 정당하게 평가하는 데 도움 되기를 기대한다.
목차
Ⅱ. 고종대 대몽 사행
Ⅲ. 장학사, 왕학사에게 보낸 서한
Ⅳ. 맺음말
<국문초록>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