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영어
Known for being the final destination and resting place to which the mortally wounded King Arthur was shipped, the exact location of the isle of Avalon still remains a mystery. This paper aims to investigate the origin, acceptance, and general attributes of the legendary Avalon from the twelfth to the nineteenth centuries. The first references to Avalon can be found in Geoffrey of Monmouth’s twelfth-century chronicles Historia Regum Britanniae and Vita Merlini as the place where Arthur’s sword Caliburn was forged, and to which Arthur was taken to be healed of his wounds. Geoffrey’s characterization of Avalon in Vita Merlini as a far-off island of apples, women, longevity, and abundance is in explicit resonance with the otherworld of Celtic myth and early Irish literature. However, because Geoffrey does not indicate the precise location of this special island, his successors, such as Etienne de Rouen and Gerald of Wales, are shown to have freely imagined and reappropriated the location and significance of Avalon for their own purposes. While Etienne locates Avalon somewhere near the land of the Antipodes and presents Arthur as an immortal fairy ruler of the lower hemisphere in a satirical manner, Gerald who claims to have witnessed the dead bodies of Arthur and his queen being exhumed in Glastonbury Abbey accepts Glastonbury as Avalon. Gerald’s establishment of Glastonbury as Avalon and Arthur’s burial place seems to have greatly influenced his posterity, including Sir Thomas Malory who re-rendered in mid fifteenth century the complex Arthurian nexus of the preceeding centuries in Le Morte Darthur . However, Malory sneaks away from the restraint of the Glastonbury-as-Avalon discourse, as he treats the end of Arthur in a highly equivocal manner. After a long semi-hibernation from Renaissance to the Romantic era, Arthuriana saw itself reborn thanks to Alfred Tennyson, who, as father of Arthurian renaissance in Victorian England, envisions Avalon in a similar manner to the twelfth-century Geoffery, never associating it with Glastonbury.
한국어
아서 왕은 색슨족으로 대변되는 이민족들의 침입으로부터 브리튼 섬을 구원 한 전설적인 영웅이며, 아발론은 마지막 전투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아서가 그 상처를 치유받기 위해서 실려 간 곳으로 알려져 있다. 본 논문의 목적은 중 세 브리튼 최고의 영웅인 아서 왕의 최종 안식처로 알려져 있지만 지도상에 표 시할 수 없고 여전히 미스테리로 남아 있는 아발론 섬의 기원과 특징, 그리고 수용을 알아보는 데 있다. 아서 왕의 안식처로서 아발론에 대한 최초 기록은 12세기 초중반 몬머스의 제프리가 쓴 문헌들에서 발견되는데, 제프리가 그리고 있는 아발론은 사과가 나는 풍요롭고 무병장수하는 섬에다 몰겐으로 대변되는 요정 같은 여성들이 다스리는 곳이라는 점에서 켈트 신화와 초기 아일랜드 문 학에서 그리는 이상향과 많이 닮았다. 하지만 제프리가 아발론의 정확한 위치를 말하지 않기 때문에 루앙의 에티엔과 웨일즈의 제랄드로 대변되는 후대 작가들 은 자신들의 이익이나 목적에 맞게 아발론을 자유롭게 재전유한 것으로 보인다. 에티엔이 아서를 불멸하는 요정으로 재탄생시켜서 그를 반인간들과 몬스터들로 알려진 앤티퍼디스인들의 왕으로 희화화하고, 그의 안식처인 아발론을 앤티퍼디 스인들의 땅 어딘가에 위치시켰다면, 웨일즈의 제랄드는 아발론이 글래스톤베리 이며, 아서가 생환할 것이라는 브리튼인들의 믿음과는 달리 그는 죽어서 왕비와 함께 글래스톤베리 수도원에 묻혔다고 주장한다. 글래스톤베리가 아발론 섬이 며, 아서의 유해가 그곳 수도원에 묻혀있다는 이 주장은 제프리 이후 하나의 주 류 담론을 형성해서 여러 중세 아서리아나 저자들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 다. 15세기 중엽 『아서 왕의 죽음』으로 중세 아서 왕 이야기를 집대성한 토머 스 말로리 역시 이 담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말로 리는 아서의 결말에 대하여 대단히 불분명한 입장을 취함으로써 글래스톤베리 가 아발론이라는 담론의 제약으로부터 교묘히 빠져나간다. 르네상스시대부터 19세기 초반에 걸친 긴 반동면으로부터 아서리아나를 깨워서 부활시킨 이가 빅 토리아 시대 아서 왕 르네상스의 아버지로 불리는 앨프레드 테니슨인데, 테니슨 이 그리는 아발론은 글래스톤베리와는 상관이 없는, 12세기에 몬머스의 제프리 가 『멀린의 삶』에서 그린 아발론과 대단히 유사한 것으로 드러난다.
목차
Ⅱ. 아발론과 켈트 신화 속 이상향
Ⅲ. 제프리 이후의 중세 아서리아나에서 아발론 :루앙의 에티엔, 웨일즈의 제랄드, 그리고 토머스 말로리
Ⅳ. 나가는 말
<참고문헌>
<국문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