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영어
This study examined the process of home economics securing an academic position under the influence of the United States after liberation and acting as a theoretical basis for life reformation in postwar agricultural extension programs. After liberation, the necessity of 'life reformation' emerged among Koreans as a solution to economic and social difficulties and a plan to build a new country. While sympathizing with the necessity, the USAMGIK chose education as a differentiated means from the "national movement" of Koreans and the totalitarian system of Japan. In this process, home economics was considered as an important study close to daily life. The United States reorganized the curriculum by reflecting the educational philosophy that values democracy, while strengthening the abilities of educators and providing public positions for home economists. When the national movement was promoted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new government in 1948, home economists also played the role of designers. However, the New-Life Movement, which was based on the slogan of austerity, had a governmentmanufactured character, and when the Korean War broke out, it turned into the logic of carrying out the wartime s ystem. After the failure of the national movement, the postwar reconstruct plan became a new area of activity in home economics. The U.S. expected the role of a messenger to transfer academic results to the rural family for home economists and used the development aid framework to provide training opportunities for Korean scholars, and sent American experts as advisors to establish organizational structure, guiding ideology, and methodology. In 1958, the agricultural extension program and community development project became the stage for practicing the American way of life reformation methodology. These businesses did not last long, and had several problems. However, the project secured the experience of life reformation as a policy and the human and organizational foundation in charge of it, which became the foundation of modern Korean rural development. In addition, as the methodology of extension program was accepted in Korean rural society, rural areas have become the main stage of the national enlightenment discourse.
한국어
본 연구는 해방 이후 미국의 영향력 하에서 가정학이 학문적 입지를 확보하고, 전후 농촌지도정책에서 생활개선의 이론적 근거로 활동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해방 이후 경제적·사회적 곤란의 해결책이자 신국가 건설의 계획으로서 ‘생활개선’의 필요성이한국인들 사이에서 대두하였다. 미군정은 그 필요성에 공감하면서도, 한국인들의 ‘국민운동’ 논리, 일제의 전체주의적 제도와 차별화된 교육을 활용하고자 했다. 이 과정 속에서 가정학은 일상생활과 밀접한 학문으로서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미국은 민주주의를 중시하는 교육철학을 반영하여교육과정을 재편하는 동시에, 교육자들의 능력을 강화하고, 가정학자들의 공적 활동 공간을 제공하였다. 1948년 제1공화국 수립 이후 국민운동이 추진될 때 가정학자들 또한 설계자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내핍생활을 기치로 한 제1공화국의 신생활운동은 관제적 성격을 강하게 띠었고,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전시체제를 수행하는 논리로 변질되었다. 국민운동의 실패 이후 미국의 전후 부흥계획이 가정학의 새로운 활동 영역이 되었다. 농업지도와 가정의 생활개선을 결합한 협동지도사업을 한국에 이식하고자 한 미국은 가정학을 전공한 전문 인력에게 연구·교육 성과를 현장으로 옮기는 전달자의 역할을 기대하였고, 개발원조의 틀을활용하여 한국인 학자들의 연수 기회를 제공하고, 자국 전문가들을 조언자로 파견함으로써 미국식 조직구조, 지도이념, 방법론을 한국에 정착시키고자 했다. 1958년의 농사교도사업·지역사회개발사업은 미국식 생활개선 방법론을 실천하는 무대가 되었다. 이 사업들은 길게 지속되지 못했고, 여러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업은 생활개선을 하나의 정책 목표로 수행하는 경험과 그를 담당하는 인적·조직적 기반을 확보하였고, 이는 현대한국 농촌지도의 토대가 되었다. 또한 농촌 주민과 상호작용하는 지도사업의 방법론이 한국 농촌사회에 수용됨으로써 1970년대의 새마을운동으로 대표되는 국민계몽담론이 농촌을 중심으로발흥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
목차
Ⅱ. 미군정의 가정과(家政科) 진흥과 대한가정학회의 신생활 운동 참여
Ⅲ. 개발원조를 통한 미국식 생활개선 모델의 도입
1. 대한 가정학회의 미국 연수
2. 미네소타 대학 자문단의 방한과 '메이시 보고서'
Ⅳ. 가정교도사업의 착수와 농촌 생활개선 체계의 확립
Ⅴ. 결론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