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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ctivities of Gurye Righteous Army and its Memory Transmission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7
초록
영어
This article examines the specific activities of the seven loyal governors of Seokjugwan, the chief of the Righteous Army (RA) in Gurye, Jeollanam-do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7. I analyzed the content and meaning of the gentry of Gurye admiring them. When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1597) broke out, Gurye was the first Japanese invasion in Jeolla-do. Japanese troops stationed in Gurye searched and brutally killed Koreans who fled into the mountains. The RA rose against the Japanese army’s violence. The activities of the seven loyal governors of Seokjugwan were divided into the 1st Righteous Army of Wang Deuk-in and the 2nd Righteous Army of the six loyal governors. The first Righteous Army activity was an activity to protect one’s county against indiscriminate looting and violence by the Japanese army in a situation where the help of the government army or the Ming army could not be expected. The second Righteous Army was an effort to protect the county from the tyranny of the remaining Japanese troops as the Japanese withdrew and further to bring back the residents who were captured by the Japanese army. However, since the end of the war, the Joseon government has paid no attention to the seven loyal governors of Seokjugwan. All of them died in battle or lived in seclusion, so they could not leave their traces during the Jeongyujaeran(丁酉再亂) period. They were not listed as a contributor to Wonjong and were excluded from private history. Regardless of the state’s approval, the local people did not forget them. Local elders regretted that the government did not reward them while talking about the old days of the seven loyal governors of Seokjugwan. In 1798, a reversal took place. In the process of reconstructing the Daeungjeon Hall of Hwaeomsa Temple, a written statement asking the Hwaeomsa Temple to provide military and military support was found in the name of six loyal governors, including WangUiseong. A diary was also found during further investigation. Through several statements, letters of mourning, and the passage of Confucian scholars in the province, the seven loyal governors of Seokjugwan eventually received the grace of the post in 1804. Then, by establishing the logic of loyalty and filial piety, the benefits of Jeongryeo were added to the Wang’s father and son. Since then, they have been enshrined in the Chunghyosa Temple side by side, and a practical book on their activities has been published. Although there are differences in order in Gurye, the order of Seokjugwan Chilui was recognized and confirmed as a historical reality by sequentially conducting the memorial service, memorial service, Confucian academy orientation, and compilation of records. It was the pride of the county that produced a number of loyal governors in small counties such as Gurye. For this reason, the people of Gurye did not give in to numerous failures and frustrations and started to worship the seven loyal governors. Through this, the ethics practiced by the seven loyal governors and their actions tried to create a place where Gurye-hyeon practiced all the people.
한국어
이 글은 정유재란 당시 전남 구례의 의병장인 석주관 7의사의 구체적인 활동과 그들 의 사후 구례의 백성들이 추진했던 현창 사업의 내용과 의미를 분석한 것이다. 정유재란 이 일어나자 구례는 전라도에서 가장 먼저 일본군의 침입을 받았다. 구례에 주둔한 일본 군은 산속으로 피신한 조선 사람들을 색출하여 잔혹하게 죽였다. 일본군의 침탈에 맞서 구례에서는 다양한 두 차례에 걸쳐 의병 항쟁이 있었고, 기록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석주관에서의 의병활동이었다. 석주관 7의사의 의병활동은 왕득인의 1차 의병과 왕의성과 5의사의 2차 의병으로 나누어졌다. 1차 의병활동은 관군이나 명군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일본군 의 무차별적인 약탈과 폭력에 대항하여 자기 마을을 지키기 위한 활동이었다. 2차 의병 은 철수하거나 잔류한 일본군의 폭력과 침탈로부터 고을을 보호하고 나아가 일본군에 포로로 잡힌 주민들을 쇄환하기 위한 활동이었다. 그 과정에서 왕의성을 제외한 6의사는 모두 순절하였다. 전쟁이 끝난 이후 조선 정부는 석주관 7의사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았다. 모두 전사하거나 은둔 생활을 했기 때문에 정유재란 당시 그들의 행적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원종공신에 책록되지도 않았고 야사에서도 빠졌다. 그러나 국가의 추인과 무 관하게 지역민들은 그들을 잊지 않았다. 지역의 부로들은 7의사의 옛이야기를 하면서 국가에서 포상하지 않음을 아쉬워했다. 1798년 반전이 일어났다. 화엄사 승당을 중수하는 과정에서 왕의성 등 6의사의 명의 로 화엄사에 승병과 군량 지원을 요청하는 격문이 발견된 것이다. 추후 조사과정에서 일기도 발견되었다. 여러 차례의 상언과 상서, 도내 유생의 통문을 통해 결국 1804년 7의사들은 증직의 은전을 입었다. 이어 충효 겸전의 논리를 세워 왕득인 부자에게는 정려의 혜택이 더해졌다. 이후 그들은 나란히 충효사에 배향되었으며, 그들의 행적 등을 정리한 실기도 간행되었다. 구례에서도 순서의 차이는 있지만 추증, 정려, 서원 배향, 기록물 편찬을 차례차례 진행하면서 석주관 칠의사의 순절을 역사적 실재로 공인받고 확정한 것이다. 구례와 같은 작은 고을에서 다수의 충의지사를 배출한 것은 고을의 긍지이자 자랑이 었다. 그렇기 때문에 구례 사람들은 수많은 실패와 좌절에도 굴하지 않고 7의사 현창에 나섰다. 이를 통해 구례현의 사민이 7의사가 실천했던 윤리와 행동을 본받고 실천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정유재란기 구례의 일본군 동향과 석주관 의병 항쟁
Ⅲ. 석주관 항쟁에 대한 기억 전승과 그 의미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