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영어
This study is a case study figuring out the socio-economic status of the residents at that time, analyzing the land status and the population in the 1910’s through the cadastral map, the cadaster(土地臺帳), and the removed family register(除籍簿) of Dangchon village, Gurim-ri, Osan-myeon, Gochang-gun, the site of Donghak Peasant Revolution Leader Jeon Bong-jun’s birthplace and childhood, and yet, the temporal gap was around 20 years. The village, itself did not change greatly. The research method was to figure out the lot number designations, land categories, owners, and terrains from the cadastral map, and then, the cadaster data for 71 land numbers were issued for the analysis of the land classes, areas, and owners. Applying the tax base in the 1910’s, the production at that time was calculated. The main points are as follows First, There are 19 houses in Dangchon Village. Their Total land is 1,629 pyeong(坪). Second, Jeon Bong-jun’s family seems to have made a living by cultivating a small field of 63 pyeong. In particular, the nine people who do not own land are presumed to be poor farmers who live on labor. In fact, the total agricultural harvest produced by fields and rice paddies in Dangchon Village is 66.298 seok(石). Third, Danchon Village has various family name, Therefore, it is not a village with a family name in the majority(集成村) As a result of the analysis, the residents of Dangchon Village showed average 3.489seok(石) per household, and compared to the number of family members, it is presumed that the people were difficult to maintain a living through one-year’s farming at the time of Donghak Peasant Revolution, The poverty and penury became to play a role as economic backgrounds of Donghak peasant Revolution in 1894.
한국어
본 연구는 동학농민혁명지도자 전봉준이 태어난 곳이자 유년을 보낸 19세기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당촌마을의 사회경제적 형편과 지역의 정체성 등을 살펴본 사례연구이다. 연구방법은 1913년도 측량원도를 통해 지번, 지목, 소유주, 지형지모를 파악한 후 71개 지번의 토지대장을 발급받아 관련 사항을 정리하고 이를 토대로 1910년대의 과세표준을 근거로 면적 당 소출량을 산출하였다. 이어 당촌마을 거주인의 제적부 일부를 확보하여 호주의 생몰연대, 본관, 전 호주의 성명, 배우자의 성씨와 본관, 자녀 등 가족관계 등을 확인하였다. 살펴보면 당촌마을 거주인은 19호로 추정되며 이들의 토지 소유 총면적은 16,290평이다. 이들은 평균 660평 정도의 면적을 소유하고 있으며 특히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9호는 노동에 의지하여 생활하는 가난한 계층으로 추정된다. 실제 당촌마을 전답에서 생산된 농업수확물은 총 66.298석으로 1호당 평균 수확량은 3.489석 즉 3석 4두 89홉이다. 이는 1912년대 1인당 쌀 소비량이 0.77석으로 평균 1호당 5인의 가족이 있다고 볼 때 쌀, 보리 할 것 없이 한해 양식만도 3.85석이 소요되어 피폐한 생활이었음이 확인된다. 당촌마을 대지 소유자는 19호로 1910년대에는 90명 이상의 인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구술에 의한 전봉준이 살았던 시기의 20여 호와 거의 같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다양한 성씨가 존재한다. 성씨별로는 김씨가 가장 많지만, 그도 본관이 달라 각성바지임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전봉준의 생가지인 63번지의 토지대장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특이한 사실은 92번지 전 소유 변화와 63번지 대지 소유 변화가 일치한다는 점이다. 이는 전봉준이 살았던 당시에도 이 토지는 묶어 매매되었을 가능성을 유추할 수 있어 아마도 전봉준 집안에서 이 작은 밭을 일구며 살았을 것으로 추정될 수 있다. 이러한 곤궁한 농촌 민의 현실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경제적 배경으로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목차
1. 머리말
2. 전봉준과 당촌마을
3. 토지 소유 현황과 사회·경제적 실태
1) 토지 현황
2) 소출 현황
3) 인구와 성씨
4.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