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영어
In the process of Goguryeo’s policy of Southward Advance, we will examine the establishment of Goguryeo’s ‘South pyeongyang’ and its location change and transition. Due to the southward Advance policy of the Goguryeo Dynasty during the King Gogukwon, the front line was lengthened in the process of southward advance to Daebang Goji, making it difficult to secure military supplies and troops from the domestic fortress to Hwanghae-do. Goguryeo needed to build a stronghold fortress, an outpost for southward advance in Hwanghae-do. Goguryeo ‘South pyeongyang’ is a product of Goguryeo’s southern advance, and it is reasonable to view the ruins of Jangsu mountain Fortress and its surroundings as Goguryeo’s ‘South pyeongyang’. However, there is a problem of ignoring the record that ‘South pyeongyang’ of Goguryeo in documents such as The Heritage of the Three States and History of Goryeo is now Seoul. King Jangsu of Goguryeo continued to pursue the policy of Southward Advance. In 475, King Jangsu of Goguryeo attacked Hanseong of Baekje, and Goguryeo occupied the Han River basin. Then, at the end of the 5th century, Goguryeo established ‘South pyeongyang’, the subsidiary capital, in Bukhansan County on the north bank of the Han River. 551 Allied forces of Baekje and Silla attacked Goguryeo in the Han River basin. Baekje restored the old lands in the Han River basin, including Hanseong, and invaded Goguryeo’s Pyeongyang. Pyongyang is not the capital city of Goguryeo, which was moved in 427. ‘South pyeongyang’ (Bukhansan County), the subsidiary capital city, was built in the late 5th century in the Jongro-gu and Jung-gu areas. In 551, along with the loss of the Han River basin, the subsidiary capital, ‘South pyeongyang’, was also lost. Goguryeo moved the lost “South pyeongyang” to Jangsu mountain Fortress in Shinwon County, Hwanghae Province, and continued to operate it as an auxiliary capital. In 551, ‘South pyeongyang’, which was relocated from the Han River basin toJangsu mountain Fortress in Sinwon County, Hwanghae Province, was called the Three capitalss of Goguryeo, along with Pyongyang Fortress and Kuknaeseong Fortress, until the fall of Goguryeo.
한국어
고구려의 남진정책 속에서 고구려 ‘남평양’의 설치와 그 위치 변화 및 변 천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고구려 고국원왕시기 남방진출로 대방 고지로 의 남진과정에서 전선이 길어져, 국내성에서 황해도로의 군수물자와 병력의 보장이 쉽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황해도를 남진의 전초기 지인 거점으로 삼아 남쪽에서 북상하는 백제를 견제하기 위한 거점성의 건립 이 필요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이 지역에 대한 지배력이 공 고화된 4세기 후반에 황해도 신원군에 장수산성 및 그 주변의 유적을 창설하 였다고 생각한다. ‘남평양’은 고구려 남방진출의 산물로서, 고구려 남방진출의 전초기지인 장수산성과 그 주변의 유적을 ‘남평양’으로 보는 것이 일리가 있 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삼국유사』· 『고려사』 등 문헌 자료의 ‘남평양’이 지금의 서울이라는 기록을 간과하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고구려 장수왕은 남진정책을 추진하였다. 475년에 장수왕이 백제 한성 및 한강 유역을 점령한 후, 고구려가 5세기 말에 한강 북안의 북한산군 즉 고려 시대 양주(남경으로 승격된 양주: 종로구·중구 일대)에 부수도인 거점성 ‘남 평양’을 설치하였다고 추정한다. 551년에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이 한강 유역의 고구려에 대한 반격작전을 펼쳤다. 그 결과 백제가 한성을 비롯한 한강 유역의 옛 땅을 수복하고 고구 려의 평양을 공파(攻破)하였다. 551년에 백제가 공파한 평양은 고구려가 427 년에 천도한 수도 평양이 아니라, 5세기 말 종로구·중구 일대에 건립한 부 수도인 ‘남평양’(북한산군)이라고 생각한다. 551년에 고구려가 한강 유역에서 상실한 ‘남평양’을 황해도 신원의 장수산 성으로 옮겨 계속 부수도로 운영하였다고 추정한다. 551년에 한강 유역에서 황해도 신원군 장수산성으로 이전한 ‘남평양’은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평양 성·국내성과 함께 고구려 3경으로 불리었다고 추정한다.
목차
Ⅱ. 고구려 고국원왕과 ‘남평양’설치
Ⅲ. 고구려 한강 유역 점령과 ‘남평양’ 설치
Ⅳ. 고구려의 한강 유역 상실과 ‘남평양’ 이전
V. 맺음말
<국문초록>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