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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전투에 참여한 독립군의 구성 : 다양한 출신의 반제노사이드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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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the Composition of Independent Forces in the Battle of Cheongsan-ri : War of Combination of Various Origins

김주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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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The loud shouts of the March 1st Movement also had a certain influence on the Korean community in Manchuria. Japanese imperialists used conciliatory and intimidating simultaneously to separate Korean immigrants and independence activists. Sympathy has been set to train pro-Japanese group, and the threat has been shown to be the so-called "Gando dispatch troops," which directly destroys the base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The Japanese invasion of Kando also caused changes in the landscape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and in the Korean community. The Japanese, who tried to "discover" independence activists by destroying national education institutions and killing teachers, faced resistance from Korean independence forces, and the product of the process was the Battle of Cheongsan-ri. The Battle of Cheongsan-ri was the most symbolic event in which the capabilities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accumulated after the March 1st Movement were exerted against the imperialist Japanese army. In this article, we analyzed the human resources that were one of the causes of the victory of the Allied Forces of the Independence Army against the imperialist Japanese forces. The independence fighters who participated in the Battle of Cheongsan-ri consisted of those who had already acquired military knowledge, including those from the righteous army, the Korean Imperial Army Military Academy, and the Shinheung Military Academy. Human resources show that the Battle of Cheongsan-ri in October 1920 was not a victory for the temporarily allied independence forces, but a result of the independence war that had been preparing for more than a decade.

한국어

3·1운동의 거대한 함성은 만주지역 한인사회에도 일정한 영향력을 미쳤다. 일제는 이주한인과 독립운동세력의 분리를 위해 회유와 협박을 동시에 사용하였다. 회유는 친일파를 양성하는 쪽으 로 가닥을 잡았으며, 위협은 독립운동근거지를 직접 파괴하는 이른바 ‘간도출병’으로 나타났다. 일제의 간도침략은 독립운동의 지형과 한인사회에도 지각 변동을 초래하였다. 민족교육기관을 파 괴하고 교사를 살해하면서 독립운동가를 ‘색출’하려 했던 일제는 한국독립군들의 저항을 받게 되 었으며, 그 과정에서 나온 산물이 바로 청산리 대첩이었다. 청산리 대첩은 3·1운동 이후 축적된 독립운동의 역량이 제국주의 일본군을 상대로 발휘된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 글에서는 제국주의 일본군을 상대로 독립군 연합부대가 승전을 거두었던 원인 가운데 하나 였던 인적 자원을 분석하였다. 청산리 대첩에 참여했던 독립군들은 의병출신, 대한제국육군무관 학교 출신, 신흥무관학교 출신 등 군사적 지식을 이미 정식으로 습득했던 인물들로 구성되었다. 1920년 10월 청산리 대첩은 일시적으로 연합한 독립군들의 승전이 아니라 10여년을 준비해온 독립 전쟁의 결과물이었음을 인적 자원들의 면면을 통해 알 수 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의병 출신 및 ‘비군인’ 출신
Ⅲ.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
Ⅳ. 중국 군관학교와 신흥무관학교 출신
Ⅴ.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저자정보

  • 김주용 Kim, Joo yong.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 부교수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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