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영어
In the early 17th century, in the Joseon Dynasty, the task of securing national finances and stabilizing people's livelihoods was in a situation of antinomy. Both tasks were desperate, but it was impossible to implement them at the same time due to conditions at the time. So if one task was prioritized, the other task had to be reserved. Accordingly, scholars and politicians of Joseon made different choices based on their respective values. There are scholars who promote policies focusing on expanding national finances, while some have suggested policies based on stabilizing people's livelihoods. Another scholar stressed that the self-reflection of leaders should be premised before this policy response. This is well seen in Hopae( ) Law. Hopae Law is a system in which an adult man wear a Hopae with his personal information on it and the state directly manages it. Hopae Law is the basis for identifying the households of each village and imposing public labor. However, because the people felt uncomfortable with this law, it had been repeatedly enforced and abolished throughout the Joseon Dynasty. Then, in the 17th century, Hoppae Law was promoted again as it carried out post-war restoration projects and sought to expand its defense capabilities. However, Hopae Law put a new burden on the people in the process of controlling the movement of the people and discovering the missing tax sources. As a result, public sentiment has deteriorated, and discussions are divided at this point. Both national finances and the need for stabilization of people's livelihoods are recognized, but opinions on what to prioritize at this point are divided. This paper aims to summarize and analyze the above and confirm the meaning of the 'Hopae Law Controversy'. The move is aimed at understanding the practical capabilities of studying abroad in Joseon by checking how Joseon Confucian scholars responded at a time when internal and external uncertainties intensified and various crises overlap.
한국어
17세기 초반, 조선에서는 국가재정 확충과 민생안정이라는 과제가 이율배 반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다. 두 과제 모두 절박했지만, 당시 여건상 동시에 시행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어느 한 과제를 우선시한다면 다른 과제는 유보해야 했다. 이에 따라 조선의 학자와 정치가들은 각자의 가치관에 근거하 여 다른 선택을 했다. 국가재정 확충에 중점을 둔 정책을 추진하는 학자가 있 는가 하면, 어떤 학자는 민생안정에 입각한 정책을 제시했다. 또 어떤 학자는 이러한 정책적 대응 이전에 지도자의 수양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모습이 잘 드러난 것이 호패법이다. 성인 남자에게 자신의 신상정 보가 적힌 호패를 차게 하고 이를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호패법은 각 고을의 호구를 파악하고 역( )을 부과하는 근거자료가 된다. 그런데 백성이 이 법을 불편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조선시대 내내 시행과 폐지를 반복해왔다. 그러다 17세기 들어 전후복구 사업을 벌이고 국방력 확충을 모색하게 되면서 호패법 이 다시 추진된 것이다. 하지만 호패법은 백성의 이동을 통제하고, 빠진 세원 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백성에게 새로운 부담을 주었다. 이에 민심이 악화하였는데 이 지점에서 논의가 갈린다. 호패를 폐지하고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면 자연히 세역( ) 자원이 늘어날 것이라는 측과 일부 소란이 있더라도 조속 히 국가의 재정 여건을 개선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민생안정에 도움이 된다는 측이다. 국가 재정과 민생안정의 필요성을 모두 인정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 서 무엇을 우선해야 할지에 대한 견해가 갈리는 것이다. 본 논문은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고 분석함으로써 인조 대 호패법 찬반 논 쟁이 갖는 의미를 확인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대내외적 불확실성이 심화하고 다양한 위기가 중첩되었던 상황에서 조선 유학자들이 어떻게 대응하였는지, 어떠한 가치를 우선했는지를 확인함으로써 조선 유학의 실천적 역량을 파악 하고자 한다.
목차
1. 머리말
2. 호패법의 전개
3. 인조대의 호패법 찬반 의견
4. 호패법 논쟁의 의미와 과제
<참고문헌>
Abstr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