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rticle

논문검색

서울 북한산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연구

원문정보

A Study of Rock-carved Seated Buddha in Bukhansan Mountain, Gugi-dong, Seoul

박영민

피인용수 : 0(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초록

영어

The Rock-caved Seated Buddha in Bukhansan Mountain, Gugi-dong, Seoul(Treasure) is located within Seunggasa Temple nearby Bukhansan Bibong. It is engraved on a huge, almost white bedrock. Until now, research on Seunggasa in Buddhist statues has been focused on the the ‘Stone Seated Statue of Buddhist Monk Seungga’, which was made in 1024(15th year of King Hyeonjong of Goryeo). However, it is not clear when Rock-carved Seated Buddha in Bukhansan Mountain, Gugidong was created. As a result, it has only been mentioned as one of the representative works of rock-caved Buddha statuses in the early Goryeo period, built around the 10th or 11th centuries of Goryeo. It is presumed that this Seated Buddha in Bukhansan Mountainis was created during the reign of King Hyeonjong along with the Monk Seungga statue, which is believed to have been created for cherishing his father Anjong. This can be proven through the excellent workmanship reflected in this award, along with the circumstances in which King Hyeonjong was deeply involved in the restoration of the ‘Seunggagul’. The Rock-caved Seated Buddha in Bukhansan Mountain, Gugi-dong adopts the representative style of the Unified Silla Dynasty sculpture, such as Bhūmisparsa(降魔觸地印) posture, Uttarāsaṅga(偏袒右肩) garment, and presenting realistic body with a rich sense of volume. As such, it can be said that this statue well mingles the style of Unified Silla Buddhist statue style and Goryeo style. In particular, the stone chatra(寶蓋) was a popular element mainly in the Goryeo Dynasty, and this statue is the only case so far that the stone chatra was applied to the rock-caved buddha statues. At the same time, the production method of the upper body with high relief and the lower body with low relief shows a stage in the process of gradually shifting from high relief to low relief. In addition, the refined sculptures applied in this Buddha statue show the dedicated craftsmanship. It can be compared with the best stone works, such as a stupa of buddhist monk and a monument, which were made under the leadership of the royal family of Hyeonjong(顯宗). On the back of the halo of the Stone seated statue of buddhist monk Seungga, the Goryeo royal family’ intention to create Rock-caved Seated Buddha in Bukhansan Mountain, Gugi-dong and 'The Seungga Cave(僧伽窟)' is engraved. Many temples have been built on Samgaksan Mountain in Baekje and the Unified Silla Dynasty. However, during the Goryeo Dynasty royal family began to pay attention intensively. In particular, the earliest records related to Samgaksan appear in the history of the Hyeonjong dynasty. Before ascending to the throne, King Hyeonjong hid in Shinheolsa(神穴寺) Temple, Samgaksan. After he became king, he led royal family members to Dobongsa Temple to avoid Khitans military invasion. After the war with the Khitans, King Hyeonjong made special support to Buddhism community, and in 1018 Hyeonhwasa(玄化寺) temple was established to hold memorial services for parents. Also, in 1016 Gwangyeontonghwawon(廣緣通化院) were built in Cheonan, an important transportation hub, and the name Bongsunhonggyongsa(奉先弘慶寺) was given to honor the will of his father Anjong(安宗). As can be seen from the background of the founding of Hyeonhwasa Temple and Bongsunhonggyongsa Temple, King Hyeonjong performed many projects for commemorating his parents. To deal with Hyeonjong efforts, Daejiguksa Beopgyeong(大智國師 法鏡) played a significant role. During the reign of Hyeonjong, Beopgyeong was the position of the Wangsa(王師), and during the reign of King Deokjong(德宗) he became the Guksa(國師). He was dead at Samcheonsa Temple(三川寺) in Samgaksan. This suggests that Hyeonjong's filial piety seemed to be a strong motivation for the rebuilding of the The Seungga Cave and the formation of the Great monk Seungga statue. The inscription on the back of the Great monk Seungga statue had a various information such as the time of construction, the names of Dong-ryang(棟梁), stone craftsman(石匠), iron craftsman(鐵匠), etc., which were related to the restoration of the temple. Therefore, it is possible that the background of a large-scale Rock-caved Buddha at the top of Samgaksan was closely related to the rebuilding of the Seungga Cave, which was carried out under the leadership of the royal family around 1024. Although there is no record that King Hyeonjong visited Seungga Cave, it is believed that there are more than 11 records of kings or royal familly visiting Seungga Cave from Munjong(文宗) and Yejong(睿宗), who succeeded King Hyeonjong. This means that Seungga Cave has already emerged as a temple, which was closely related to the royal family since the reign of King Hyeonjong. And it is a part that gives a glimpse into the situation where King Hyeonjong was directly involved in the rebuilding of the Seungga Cave. On the other hand, Lee-Oh(李䫨) wrote the article, "三角山重修僧伽崛記" in 1099. This article record that the position of the Great monk Seungga statue was revised and the timbers of the old building were replaced. However, there is no record of the creation of the rock-caved Buddha. From this, it can be inferred that the Rock-caved Seated Buddha in Bukhansan Mountain, Gugi-dong was already built before the rebuilding in 1099. Based on this, the period of creation of Rock-caved Seated Buddha in Bukhansan Mountain, Gugi-dong can be narrowed down to before King Munjong(reign, 1046~1083), where frequent royal visits begin, and more specifically, to the period of rebuilding of Seungga Cave at Hyeonjong dynasty. In other words, the Rock-caved Seated Buddha in Bukhansan Mountain, Gugi-dong is a important work, by which the traditional style of Unified Silla is converted into Goryeo. It can be defined as a representative Buddhist statue of the 11th century of Goryeo, produced under the leadership of the royal family around 1024 (the 15th year of King Hyeonjong).

한국어

서울 북한산 구기동 마애여래좌상(보물)은 북한산 비봉의 정상부 바로 아래에 입지하며, 백색에 가까운 거대한 암반에 새겨져 있다. 마애불은 서울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상(보물)이 봉안되어 있는 승가사 경내에 있다. 지금까지 불교조각사에서 승가사에 대한 연구는 1024년(고려 현종 15) 조상명이 있는 승가대사상에 집중되어 왔다. 그러나 구기동 마애여래좌상은 같은 승가사 경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상명이나 기록이 뚜렷하지 않아 고려 10세기, 혹은 11세기 무렵에 조성된 고려 전기 마애불의 대표작 중 하나로 언급되어 왔을 뿐이다. 이 마애여래좌상은 현종이 아버지 안종의 추선을 위해 조성한 것으로 여겨지는 승가대사상과 함께 현종대에 조성된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는 ‘승가굴’의 중수에 현종이 깊이 관여한 정황과 함께, 이 상에 반영된 뛰어난 작품성을 통해 입증할 수 있다. 북한산 구기동 마애여래좌상은 편단우견의 착의법에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는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도상을 채용하였고, 양감이 풍부한 사실적인 신체를 구현하는 등 앞 시기 불상 양식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이 상은 통일신라의 도상과 양식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제작 방식과 얼굴, 도상의 변형 등을 통해 고려 불상 양식의 새로운 전형을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보개는 고려시대 거석불(巨石佛)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한 요소로서, 본 상은 마애불에 보개가적용된 것으로서는 현재까지 유일한 사례이다. 이와 함께 상반신은 고부조, 하반신은 저부조 방식으로 조성된 제작 방식은 마애조상의 제작 방식이 고부조에서 점차 저부조로 이행하는 과정의 한 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마애불에 구사 된 세련되고 정제된 조각은 장인의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현종대 왕실 주도 하에 제작된 승탑, 비 등 당대 최고의 석조미술품과 비견할 수 있다. 북한산 구기동 마애여래좌상의 조성 배경은 삼각산(三角山)과 ‘승가굴(僧伽窟)’에 대한 고려 왕실의 태도와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상 광배 배면에 있는 명문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백제의 도읍을 정한 장소이자 통일신라 때 小祀를 지내기도 한 삼각산에는 많은 사찰들이 건립되어 왔지만, 왕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고려 때부터이다. 특히 『고려사(高麗史)』중 삼각산과 관련된 기록이 가장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현종대(顯宗代)이다. 현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 삼각산 신혈사(神 穴寺)에서 은거하였고, 재위 직후에는 어가를 이끌고 도봉사(道峰寺)로 가 난을피하기도 하였다. 현종은 거란과의 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불교의 재건에 특히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1018년에는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현화사(玄化寺)를 창건하였다. 또한 1016년에는 교통의 요충지였던 천안에 사찰과 광연통화원(廣緣通化院)을 짓고, 아버지 안종의 뜻을 받든다는 의미로 ‘봉선홍경사(奉先弘慶寺)’ 라는 명칭을 붙이기도 하였다. 현화사와 봉선홍경사의 창건 배경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현종은 재위기간 중 부모의 추선을 위한 많은 불사를 행하였고, 이를 적극적으로 보필한 것은 대지국사 법경(大智國師 法鏡)이다. 법경은 현종 재위간 중 왕사(王師)의 지위였고, 덕종대에 국사로 책봉된 이후 삼각산 삼천사(三川寺)에서 입적하였다. 이는 승가굴의 중수와 승가대사상의 조성에 현종의 효심이 강하게 작용하였을 가능성을 시사하며, 그 배경에는 당시 삼각산을 배경으로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대지국사 법경의 도움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승가대사상 배면의 명문에는 조성 시기와 함께 사찰 중수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동량(東梁), 석장(石匠), 철장(鐵匠) 등의 명칭이 함께 기록되어 있어, 승가대사상이 조성된 1024년에는 승가굴 전체에 대대적인 중수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삼각산 정상부에 이와 같이 거대한 규모의 마애불이 조성된 배경에는 1024년 무렵 왕실 주도 하에 진행된 승가굴의 중수가 밀접하게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현종이 직접 승가굴을 방문하였다는 기록은 없지만, 현종의 뒤를 이은 문종-예종대에 이르기까지 왕 또는 어가가 승가굴에 행차한 기록이 11차례 이상 전하는 것으로 보아 현종대 이후 승가굴이 왕실의 願刹에 가까운 사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승가굴이 이미 현종대 이래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찰로 부상하였음을 의미하며, 승가굴 중수에 현종이 직접 관여했던 정황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한편 1099년 숙종의 승가굴 중수를 기록한 이오(李䫨)의 「삼각산중수승가굴기(三角山重修僧伽崛記)」에는 승가대사상의 위치를 바로잡고 오래된 건물의 부재들을 교체하였다는 내용이 있으나, 마애불의 조성과 관련된 기록은 없다. 이로 보아 마애불은 이미 1099년의 중수 이전에 조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짐작 할 수 있다. 이를 근거로 마애불 조성 시기는 왕실의 빈번한 행차가 시작되는 문종대 이전, 더 구체적으로는 현종대 승가굴 중수 시기로 좁혀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북한산 구기동 마애여래좌상은 통일신라의 전통 양식이 고려화되는 단계에 위치하는 작품으로서, 1024년(현종 15년)을 전후한 시기에 왕실의 주도 하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서울 북한산 구기동 마애여래좌상의 현상과 특징
1. 현상과 특징
2. 보개
3. 목조 가구의 흔적
Ⅲ. 서울 북한산 구기동 마애여래좌상의 조성 배경과 ‘승가굴’
1. 고려 왕실과 三角山
2. 고려 왕실과 僧伽窟의 重修
Ⅳ. 고려 현종대의 불교 중흥과 서울 북한산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Ⅴ.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저자정보

  • 박영민 Park, YoungMin. 불교문화재연구소 연구관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함께 이용한 논문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 8,200원

      0개의 논문이 장바구니에 담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