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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시대 일본 근대 산업화의 표상 ― 1945-60년 일본 원자력・수력 발전의 수용배경과 역사를 중심으로 ―

원문정보

The symbol of Japanese modern industrialization during the Cold War era ─ Focusing on the acceptance process & history of nuclear and hydroelectric power generation in Japan in 1945-60 ─

윤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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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Japan accepted the energy policy of Atoms for Peace, even though it was the first atomic bomb victim country. This choice eventually resulted in the regeneration of the exposure experience connecting Hiroshima-Nagasaki-Bikini Island-Fukushima for the first time in more than 50 years with the 3・11(Fukushima Nuclear Plant Incident). This became an event that raised fundamental questions about Japan’s identity as a modern nation and a re-evaluation of Japan’s policy of high economic growth under cooperative diplomacy that was dependent on the US after the war. Japan’s participation in nuclear power generation was due to the US intention to cover up and replace the fear of nuclear war caused by the Cold War era in the 1950s in the name of peace. In addition, Japan, which had become an Asian anti-communist partner of the United States, entered the Southeast Asian economic market through post-war compensation, where dam construction plants such as the TVA method were exported from the United States and Japan with a hierarchical chain. This was used as a tool to prove the economic superiority of the capitalist camp during the Cold War, and its existence itself became a symbol of the progress of science and technology and human civilization. At that time, conquering and transforming nature with overwhelming power was considered a symbol of ‘Industrial development’, so the grandeur of the huge dam became a symbol of ‘modernization’ and ‘development’ along with the nuclear power plant, a product of cutting-edge science and technology.

한국어

최초의 피폭국이면서도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미국 에너지정책을 수용한 전 후 일본의 선택은, 결국 3・11을 계기로 50여 년 만에 히로시마(広島) – 나가사키(長崎) – 비키니섬– 후쿠시마를 잇는 피폭의 경험을 재생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는 일본에 게 패전 이후 선택한 대미종속적 협조외교 하에서의 고도경제성장 정책에 대한 재평가 및 근대국가 일본의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함께 던지는 사건이 되었다. 일본이 원자력 발전에 동참한 것은 냉전이 시작된 1950년대 핵무기 개발 경쟁으로 발생한 핵전쟁 의 공포를 평화라는 명분으로 치환・은폐하고자 했던 미국의 의도 때문이었다. 또한 미국의 아시아 반공파트너가 되었던 일본은, 전후배상을 통해 동남아 경제시장 에 진출하게 되었고, 여기서 TVA방식과 같은 댐 건설 플랜트가 층위적 연쇄성을 갖고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수출되었다. 이는 냉전시대 자본주의 진영의 경제적 우위를 증명하 는 도구로 활용되었으며,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과학기술・인류문명의 진보를 상징하는 것이 되었다. 당시에는 압도적인 힘으로 자연을 정복하고 변형하는 것이 ‘산업발전’의 상징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거대한 댐의 위용은 최첨단 과학기술의 산물인 원자력 발전소 와 함께 ‘근대화’와 ‘발전’의 표상(表象)이 되어 갔다.

일본어

最初の被爆国でありながら「原子力の平和利用」というエネルギー政策を受け入れた 戦後日本の選択は、3・11を契機に約50年ぶりに「広島-長崎-ビキニ島-福島」を結ぶ被爆 の経験を再生させる結果をもたらした。これは日本にとっては敗戦後選択した対米従 属的協調外交の下での高度経済成長政策に対する再評価および近代国家日本のアイデ ンティティに対する質問まで同時に見直されるべきであるという第一歩を示した。し かし、日本が原子力発電に加わったのは、1950年代の冷戦時代、核兵器開発競争で発 生した核戦争の恐怖を平和という名分で置き換え、隠ぺいしようとした米国の意図の ためだった。 また、アメリカのアジア反共パートナーとなった日本は、戦後賠償により東南アジ アの経済市場に進出することとなった。ここで、TVA方式のようなダム建設プラント が層位的連鎖性を持って米国と日本から輸出された。これは冷戦時代、資本主義陣営 の経済的優位性を証明する道具として活用された。それは存在だけでも科学技術・人 類文明の進歩を象徴するものとなった。 当時は圧倒的な力で自然を征服し、変形する ことが「産業発展」の象徴とされたため、巨大なダムの威容は最先端科学技術の産物で ある原子力発電所とともに「近代化」と「発電」の表象となっていった。

목차

<要旨>
Ⅰ. 머리말
Ⅱ. 원자력발전의 도입과정
Ⅲ. 전후배상 속 TVA와 수력발전
Ⅳ. 맺음말
参考文献
<要旨>

저자정보

  • 윤정환 한남대학교 탈메이지교양교육대학 강사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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