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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8세기 함안조씨 문중의 정주(定住) 아이콘 - 남원시 봉황대(鳳凰臺)·정(亭) -

원문정보

The Icon of Haman Cho's Family’s Settlement during the 16th ~ 18th Century - Bonghwangdae․Bonghwangjeong in Namwon City -

김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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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Located in Jukgok(竹谷) Village, Daegok-ri(大谷里), Daesan-myeon(大山面), Namwon City(南原市), Bonghwangdae(鳳凰臺) attracted public attention as a time-honoured natural correlative especially for the legend of Crying Rock (鳴 巖). From the late Goryeo(麗末) until before the 19th century, Bonghwangdae emerged as a magical place in Jukgok-dong(竹谷洞) for the mysterious power of the legend of crying rock to foresee the future. Meanwhile, Bonghwangdae and crying rock entered upon a new phase of being connected with a certain family by Yuljeong(栗亭) Cho Jong-rye(趙從禮) and his descendants belonging to Haman Cho's Family(咸安趙氏) who moved from Hamyang(咸陽), Gyeongsangu-do(慶尙右道) to Jukgok-dong. In other words, crying rock changed into an icon that represents successful settlement of Jehakgong clan(提學公派) by foreknowing Cho Jong-rye and his descendants’ passing the literary examination and classics and literary licentiate consecutively through its crying sound. In addition, number of rhyme-borrowing poems(次韻詩) responded to the created by Sinjae(愼齋) Cho Rim(趙 琳) expanded internal influence of the family within the area. As Cho Jong-rye‘ descendants rarely entred government service after the 19th century, however, Bonghwangdae entered a new phase. Especially, established on the site, the reason for Bonghwangjeong(鳳凰亭) to become an object of attention has the same way with progress of extinction of the legend of Bonghwangdae. 『A Book of Bonghwangdae Poems (鳳凰臺詩集)』 published under the leadership of a community meeting(契) which was formed with Bonghwangjeong as a base in the 1970s was a sign that Bonghwangjeong changed completed to a culture space for residents beyond privatization of a family.

한국어

남원시 대산면 죽곡마을에 소재한 봉황대는 유서 깊은 천혜의 자연적 상관물로, 특히 울음바위[鳴巖] 전설로 인하여 고려 말엽부터 세인의 이목을 끌었다. 조선시 대 때 대곡방에 소속되었던 봉황대에 새겨진 암각화는 이 일대가 민초들이 생업을 유지하기에 매우 적합한 터전임을 시사해 준다. 차후 고려말에서 19세기 이전 시 기에 이르기까지 봉황대는 이곳의 명암 전설이 발휘한 신비로운 예지력으로 인해 죽곡동의 영험한 명소로 부상하게 된다. 그러던 차에 경상우도의 함양에서 죽곡동으로 이주한 함안조씨 제학공파의 파 조인 율정 조종례와 그 후손들에 의해서, 봉황대와 명암은 특정한 문중과 결속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즉, 조종례를 위시한 이 일문의 문과·생원·진사시 합격 사실을 명암이 연속적으로 묵시해 보임으로써, 제학공파 일문의 성공적인 정착 을 상징해 주는 아이콘으로 변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신재 조림이 창작한 <명암운>에 하서 김인후가 차운시로 화답한 이래로, 후손들이 지은 일련의 차운시 들은 이 문중의 대외적 영향력을 제고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정자를 창건한 주체를 둘러싼 의론 또한 이러한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19세기 이후로 제학공파 후손들의 관직 진출이 뜸해지면서, 봉황대는 새 로운 국면으로 이행하게 된다. 또한 그간 여러 차례에 걸쳐서 중건·중수되었던 봉황정이 관심의 초점으로 부상하게 된 것도 봉황대 전설의 퇴각이라는 추이와 궤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1970년도에 이르러 봉황정을 모태로 하여 결성된 계모임과 이 조직의 주도적인 노력에 힘입어 발간된 『봉황대시집』은, 바야흐로 봉황정이 탈문중화라는 시대적 흐름에 맞춰서 주민 공동의 문화적 공간으로 탈태하였음을 알 려주는 의미 있는 신호였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율정(栗亭) 조종례(趙從禮)의 남원 이주
3. 제학공파(提學公派)의 정주(定住) 아이콘화
4. 봉황정 중건과 탈문중화 국면
5. 맺음말
참고문헌

저자정보

  • 김종수 Kim Jong-su. 세명대학교 교양대 강사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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