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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靜菴의 성군 정치론과 그 실현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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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the Confucian Political Theory of Jo Gwangjo(Jeong-am) and the Practical Restriction of It

조정암의 성군 정치론과 그 실현의 한계

조남욱, 조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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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This paper aims to research the conditions and possibilities of the politics of Confucianism by examining in detail various factors from the reality of the good and wise king( )'s political theory pursued by Jo Gwang-jo(pen name : Jeong-am) to the practical limitations of the The Annals of King Jungjong and Jeong-am anthology. Jeong-am showed a positive attitude that ‘there is nothing not to say about what he knows’, and in particular, he focused on strengthening the position and capacity of the monarch for the reproduction of the era of the good and wise king toward 'perfect politics of Emperor Yao and Shun( )'. Among the reform measures for realizing this, the dissolution of Sogyeokseo was completed smoothly, but in the case of the movement to delete the deeds targeting meritorious retainers and in the case of Hyeollanggwa enforcement, it caused Third Literati Purge of 1519 due to the antipathy of King Jungjong who was conscious of the Hungu( ) forces. In this process, the application of Confucian ideology to politics in general gives the following lessons. First, real politics does not unfold as textbooks as in the a good and wise king era. Second, Sarim( )'s good will made it difficult to overcome Hungu's lust for power. Third, if a subject overlooks the inner feelings of the absolute monarch, it will have the opposite effect. Therefore, it has been confirmed that the political culture of Emperor Yao and Shun can only be realized only when the king and his subjects form a sense of unity by taking the path of a holy monarch and a courteous servant as their calling.

한국어

이 논문은 『중종실록』과 『정암선생문집』을 중심으로 정암 조광조가 추구 한 성군 정치론의 실상에서 그 실천적 한계상황까지의 여러 요소를 상세히 살펴서 유교정치론이 가지는 조건과 가능성을 검토하였다. 유교의 학문과 덕행을 공부하는 선비는 기본적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도덕 국가 건설에 동참하는 길을 걷고자 한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고 그러한 학 덕 연마에 열중하던 정암 조광조 역시 그러한 인생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 나 그의 나이 17세 때(1498)에는 무오사화를 목격하고 또 23세 때(1504)의 갑 자사화에서는 스승 김굉필을 잃는 슬픔을 겪게 됨으로써 출사( )에는 신중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중종반정을 거쳐 정국이 점차 안정되어가자 그런 생각이 변하여 진사시험에 응하고 또 성균관 유생으로 나아갔다. 34세 때에는 그의 학덕이 높게 평가되어 조정의 천거를 받았으나 그는 과거시험을 통한 떳떳한 벼슬길을 택했다. 중종 임금의 호의에 따라 정암은 주로 경연을 기회로 유교의 성군 정치론 을 피력하는 것은 물론, 그 실현을 위한 정치개혁 노선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그처럼 활발한 모습을 보인 지 만4년 정도가 되어서는 불의의 사화를 만나니, 그는 38세로 생을 마치게 된다. 비록 그 기간은 짧았으나, 유교 정치문화 발 전과 유자의 이상경인 진유( )를 향해서는 괄목할만한 모습을 남겼다. 사관들의 기록에서도 전하듯이 정암은 ‘아는 것은 말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의 적극성을 보였으니, 특히 요순 지치( )를 향한 성군 시대의 재현을 위한 군주의 입지( )와 역량 강화 부분에 집중하였다. 이의 실현을 위한 개 혁방안 가운데 소격서 혁파의 건은 원만히 마무리되는 편이었지만, 공신들을 대상으로 하는 위훈 삭제 운동과 현량과 시행의 경우는 훈구세력을 의식한 중종의 반감으로 사화 발생의 요인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정치 일반은 성군 시대처럼 원론같이 전개되는 것은 아 니라는 사실, 사림의 선의지는 훈구의 집권욕을 이겨내기 어렵다는 점, 그리 고 절대 군주의 속마음을 간과하면 역효과를 맞게 된다는 점 등을 알게 되었 다. 즉 임금과 신료들 모두가 성군현상( )의 길을 자기의 일로 여기며 한결같이 일체감을 형성해갈 때에만이 비로소 요순 성군의 정치문화는 발현 될 수 있겠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목차

논문 초록
1. 서론
2. 경연에서 펼친 성군 정치론
3. 행정상의 제도 개혁 추구
4. 성군정치 실현의 한계
5. 결론
<참고문헌>
Abstract

저자정보

  • 조남욱 Cho Nam-Uk. 부산대학교 명예교수
  • 조장연 Cho Jangyun. 성균관 책임연구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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