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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역참 양로청의 변천과 역리 가계 검토

원문정보

The transformation of the Osu station and the research of lineage of the station officers

김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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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This study examines erection and changes of Osu old people’s home through books owned by old people’s home: Yangrocheong-Seonsaengan, Yangroan, and Yangroan-jeolmok. Yangrocheong erected by Choi Ju-ha, Chalbang of a post town in Osu, was managed to 1895. It only permitted to enter people who served as Yeokri and over the age of 60. For the local government system was changed after 1895, it revised the regulation in 1914 to permitting to only people descendants of Sampa, Gimhae Kim’s Clan. Yangrocheong-Seonsaengan was included the names of 144 who served as Yeokri, and Yangroan of 217 as a result of an analysis of two books. Gimhae Kim’s Clan people accounted for 89%, 217 people among 195, except 22 people, in 12 clans: Gwon, Park, Paek, Jo, Lee, Jin, Ji, and so on. So, it can concluded that the Yeokris in a post town in Osu are mostly descendants of Sampa of Gimhae Kim’s Clan. A Clan in Osu-ri, Osu-myeon, Imsil-gun is a descendant of Kim Gi-son. He retired to Osu after 1498, and handed Yeokri of a post town in Osu over as a national servant. According to Yeojidoseo in 1659 and Honameupji in 1872, the number of total households in a post town in Osu was 360s, and of total villagers was 1,440s including the lowest class of people. But according to Honameupji in 1793, there was a different record that the number of total households was 461. I think there are households not to belong to a post town in Osu around there.

한국어

본 고는 현재 오수양로당에서 소장하고 있는 『양로청선생안(養老廳先生案)』과 『양로안(養老案)』, 『양로안 절목(養老案節目)』을 중심으로 오수양로당의 건 립과 변천을 살펴본 것이다. 1712년 오수역의 찰방(察訪) 최주하(崔柱夏)가 설 치한 양로청(養老廳)은 1895년까지 유지되었는데, 당시에는 오수역의 역리를 지낸 영이방(令吏房)과 부이방(副吏房)을 역임하였고, 회갑이 지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1895년 조선의 역제도가 되어 양로청의 규약이 유 지될 수 없게 되자 1914년 규약을 개정하여 61세 이상 노인으로 김해김씨 삼 파(三派)의 후손만 들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양로청 선생안』과 『양로안』에 기재된 성씨를 분석한 결과, 『양로청 선생안』에는 각 시기별 영이방과 부이방을 지낸 144명이 수록되어 있고, 『양로안』에 217명이 수록되어 있다. 『양로청 선생안』과 『양로안』에 수록된 217명 중 에서 195명이 김해김씨로, 약 89%를 차지하고 있다. 그 외에 권씨, 박씨, 백 씨, 조씨, 이씨, 진씨, 지씨 등 12개 성씨는 22명으로 약 11%를 차지하고 있다. 오수역 역리(驛吏)는 대부분은 김해김씨 삼파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다.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거주하는 김해김씨는 삼현파로서 매헌종중(梅軒宗 中)이라고도 하는데 매헌(梅軒) 김기손(金驥孫)을 입향조로 삼고 있다. 김기손 등 김해김씨는 무오사화(1498)이후 낙향하였다가 오수역의 역리를 세습하였 다. 아마도 사화와 연루되어 처벌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역리로 정속(定屬)된 것으로 추정된다. 『여지도서』(1659)와 『호남읍지』(1872)에 의하면, 오수역의 편호는 약 360호이고 오수역의 역리를 포함한 노비, 일수(일수) 등을 모두 합 친 인원은 1,440명이다. 그런데 『호남읍지』(1793)에는 오수역이 남원부 48개방 중에 하나로 기재되어 있는데, 오수역(坊)의 편호는 461호라고 한다. 오수역과 오수역(坊)의 편호 차이는 오수역 주변 마을에 오수역 소속이 아닌 편호가 있 었던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오수역참 『양로청선생안』과 양로청의 변천
Ⅲ. 오수역참 역리(驛吏) 가계와 김해김씨 삼파
Ⅳ. 맺음말
<국문초록>

<참고 문헌>

저자정보

  • 김철배 Kim, Chul-bae. 문학박사, 임실군청 학예사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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