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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1940년대 林得山의 在中抗日獨立運動

원문정보

Independence Movement of Im Deuk-san in China around 1920s~1940s

1920-1940년대 임득산의 재중항일독립운동

송민지

숭실사학회 숭실사학 제46집 2021.06 pp.137-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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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Im Deuk-san was born in Cheolsan(鐵山), Pyeonganbuk-do in 1896. When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was established in Shanghai, China, Im traveled between Korea and China to serve as the correspondent. In 1920, he went to Andong(安東) with bombs manufactured by Shanghai National Salvation Adventure Group and sent them to the Korean Volunteer Corps branch. In 1923, Im suggested Tongeuibu(統義府) Volunteer Army of financial and military proposals as provisional government’s ‘special correspondent of Kuwandiyen(寬甸)’. While he tried to head to The South Sea(南洋) to establish the base, he faced financial difficulties and failed to visit The South Sea. Later, Im decided to practice ‘Mu Shil Yok Haeng (務實力行)’ of Young Korean Academy(興士團) and started a fountain pen business. All the revenues from fountain pen were used for Korean National Revolutionary Party, Korean Volunteer Corps, and Chinese Military Committee. The existing researches on the independence movement of Im only focused on his activities in early stage of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from 1919 to 1920. However, his independence movement continued until he died in Shanghai in 1944. Im participated in forming Korean National Revolutionary Party for the independence of Korea and supported Korean Volunteer Corps. His activities show the new characteristics of the member of Korean National Revolutionary Party. In addition, Im became a sponsor for Korean Volunteer Corps and Chinese Military Committee during Sino-Japansese War. This demonstrates how he developed independence movement as a man of property. Thus, this study seeks to re-spotlight on the figure, Im Deuk-san, by focusing on his independence movements from 1920s to 1940s.

한국어

임득산은 1896년 평안북도 철산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조직되 었을 때 국내와 상해를 오고가며 국내통신원 역할을 했다. 1920년에는 상해 구국모험단에서 제조 한 폭탄을 소지하고 안동현으로 가서 폭탄들을 국내 의용단 지부로 보냈다. 1923년에는 임시정 부 ‘寬甸 특파원’으로서 통의부에 경제와 군사 방면으로 건의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 이후에는 근거지를 설치하기 위해 南洋으로 향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여 南洋으로 가는 것에 실패하였다. 이후에는 흥사단의 ‘務實力行’을 실천하기로 결심하고 만년필사업을 시작 했다. 만년필사업으로 번 수입은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 중국군위원회 등에 사용되었다. 기존 연구에서 임득산의 독립운동은 1919년~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초창기 활동만이 주목되 어 있다. 그러나 그의 독립운동은 1944년 그가 상해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임득 산은 한국독립당으로서 민족혁명당 창당에 참여하여 이후 조선의용대를 후원하기에 이르렀다. 또 한 중일전쟁 시기 조선의용대와 중국군위원회에 후원자가 된 임득산을 통해 자산가로서 어떻게 독 립운동을 전개하였는지 확인해 볼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중국관내에서 전개한 임득산의 독립운동을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집중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임득산이라는 인물을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상해 임시정부 무장투쟁 활동 전개
1) 국내 통신연락과 폭탄제조 활동
2) 임시의정원 선임과 군사 훈련지대 건설 시도
Ⅲ. 조선민족혁명당 자금 지원 활동
Ⅳ. 조선의용대에 대한 인식과 순국
Ⅴ.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저자정보

  • 송민지 Song Min-Ji. 숭실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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