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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돈암리 이주민 히라야마 마사쥬(平山政十)와 平山牧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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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am-ri Immigrant Masaju Hirayama and Hirayama Ranch in Japanese Colonial Period

일제강점기 돈암리 이주민 히라야마 마사쥬(평산정십)와 평산목장

조규태

숭실사학회 숭실사학 제46집 2021.06 pp.11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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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This paper deals with the business, relief service, and catholic activities of Masaju Hirayama, a Japanese who lived in Don-am-ri, Soong-in-myeon, Go-yang-gun, Gyeonggi-do. First, the background of Hirayama Masaju's entry into Joseon and his immigration to Don-am-ri was reviewed. Second, I dealt with the management activities of the Hirayama Ranch in Don-am-ri and its achievements. Third, Hirayama's relief efforts were reviewed. Fourth, I contemplated the production of Catholic films and Catholic-related writing activities of him, and their meanings. Hirayama, a native of Nagasaki, entered Joseon in 1901 to help his father who run a Hirayama Ranch in downtown Seoul. After his father's death in 1908, he inherited Hirayama Ranch and moved to Don-am-ri in 1913. Hirayama developed his ranch into one of Seoul's leading ranches with keeping his faith about the samurai spirit and catholic. He imported Holstein cows from Hokkaido and imported homogeneous machinery from France to produce excellent good milk. Also he produced and sold various milk s, cheese, and milk cosme tic. Milks produced at his ranch was supplied to the Hospital of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and received favorable reviews. As a Catholic, he carried out a campaign to help the poor and suf ferers around him. He released Koreans who were imprisoned during the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and helped the victims of the flooding in Don-am-ri. In particular, he established Namjeong-dong, Bukjeong-dong, and Dongjeong-dong, which were self-help villages for poor Koreans, and enhanced their willingness and self-support capabilit ies. Meanwhile, he produced films promoting Catholicism, wrote books, and introduced writings. He made a Japanese film “The tw enty-six martyrs of Japan”, and wrote The Mansei Movement and Catholic in 1930, and translated and introduced articles on the humanitarian economy in Japan's catholic magazine in 1936-37. In 1939, he published a book titled A General Survey of Mongolia Catholic. However, his relief efforts, the production of Catholic film, and the writing about catholic did not have pure intention He closely interacted with Governor-General Saito, Uugaki, and officials. He produced a film called “The twenty-six Martyrs of Japan” and promoted it to the West, with the purpose of weakening the anti-Japanese emotion of the Western Empire after the Manchurian Incident. Immediately after the Sino-Japanese War, he published A General Survey of Mongolia Catholic to improve relationship between Japan and the Vatican, and to provide the Japanese government and military information needed to invade China and Mongolia. Based on the Samurai and Catholic spirit, he developed Joseon's herding industry and supported the Korean peoples. He also contributed to the development of Catholicism through a Catholic film and books. However, his actions were aimed at controlling and ruling Koreans by the Governor-General of Korea, expanding of the Japanese Empire and spreading of Japanese culture. In this regard, he was a Japanese subject rather than a Catholic, and an active supporter of the implementation of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s policies.

한국어

이 논문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돈암리에 거주한 재조일본인 히라야마 마사쥬의 경제활동과 구호활동, 그리고 가톨릭을 통한 일본제국의 세력 확장과 조선통치 후원 활동을 다룬 글이다. 첫째 히라야마 마사쥬의 조선 입국과 돈암리 이주 배경에 대하여 검토하였다. 둘째 그의 돈암리에서의 히라야마목장 경영 활동과 그 성과에 대하여 다루었다. 셋째 히라야마의 구호활동에 대해 검토하였다. 넷째 히라야마의 가톨릭 영화 제작과 가톨릭 관련 저술 활동과 그 의미에 대하여 검토하였다. 일본의 나가사키 출신인 히라야마는 1901년 서울 시내에서 히라야마목장을 경영하던 아버지를 돕기 위해 조선에 들어왔다. 그리고 1908년 아버지의 사후 히라야마목장을 물려받아 경성부 大和町에서 경영하다가 1913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돈암리로 이주하였다. 신의를 지키는 무사도 정신으로 히라야마목장을 운영한 히라야마는 히라야마목장을 서울 굴지의 목장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북해도에서 홀스타인 젖소를 수입하고, 프랑스에서 균질기계를 수입하여 양질의 우유를 생산하고, 우유를 활용하여 치즈, 미장유 등의 상품을 생산·판매하였다. 히라야마목장에서 생산된 우유는 조선총독부의원(경성제국대학 부속의원) 등에 납품되어 호평을 받았다. 가톨릭신자로서 그는 주위 사람들을 구호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3·1운동 시 수감되어 있는 한인을 석방시켰고, 돈암리의 홍수로 인한 이재민을 구호하였다. 특히 청계천 주변의 조산과 신당동 등지에 있던 가난한 한인들을 위한 자활촌인 남정동·북정동·동정동을 개발하여 그곳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계몽을 통해 자활의지와 자활능력을 제고하였다. 한편 그는 가톨릭을 홍보하는 영화를 제작하고 책을 저술하고 글을 소개하였다. 2~3년의 조사와 국내외 촬영을 거쳐 1931년 『殉敎血史 日本二十六聖人』이란 영화를 제작하였다. 1930년 『萬歲運動とカトリッケ敎』라는 책을 저술하였고, 1936~37년에는 일본 『カとトリッケ』 잡지에 인도적 경제에 대한 글을 번역·소개하였다. 그리고 1939년에는 『蒙疆カトリツク大觀』이란 책을 발간하였다. 그런데 그의 가톨릭 정신에 입각한 구호활동과 가톨릭 관련 영화의 제작과 저술 활동은 순수한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사이토·우가키 총독 및 관료들과 긴밀히 교류하며 일본의 조선 지배에 협력하였다. 그리고 『殉敎血史 日本二十六聖人』이란 영화를 제작하여 서구에 선전함으로써 만주국 수립 후 악화되는 서구 제국의 반일여론을 약화시켰다. 또 중일전쟁 직후인 1938년 몽골연합자치정부의 촉탁으로 『蒙疆カトリツク大觀』이란 책을 발간하여 일본과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를 개선시키고, 일본의 정부와 군에 중국과 몽골 침략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그는 무사도와 가톨릭 정신을 바탕으로 조선의 목축업을 발전시키고 조선인을 구호하였다. 그 리고 가톨릭 관련 영화와 책의 제작 및 저술을 통해 가톨릭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행동은 조선총독부의 조선인 지배와 통치, 일본제국의 확장과 일본문화의 확산을 위한 목적을 지 녔다. 그런 점에서 그는 본질적으로 가톨릭신자라기보다 일본의 臣民이었고, 조선총독부 정책 수 행의 적극적 조력자였다.

목차

1. 머리말
2. 조선 입국과 돈암리 이주
3. 돈암리에서의 히라야마목장 운영
4. 돈암리에서의 한인구호 활동
5. 가톨릭 영화 제작과 저술 활동
6.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저자정보

  • 조규태 Kyutae Cho. 한성대학교 크리에이티브인문학부 교수.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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