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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琿春事件’과 일본군의 ‘間島出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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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unchun Incident’ and the ‘Kando Intervention’ of Japanese Army in 1920

1920년 ‘혼춘사건’과 일본군의 ‘간도출병’

장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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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This study reexamined the conventional view that the Japanese Empire caused the 'Hunchun Incident(琿春事件)' to carry out the so-called 'Kando Intervention(間島出兵)' of Japanese Army in 1920, and attempted to reveal the historical details of the Hunchun Incident and the Kando Intervention of Japanese Army in a new light. Until now, research on the history of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has maintained the view of the so-called 'the theory of Japanese instigation of the Hunchun Incident' that the Japanese thoroughly planned and implemented the Japanese military's dispatch of troops in 1920, and that the incident was caused by Japan's inciting pro-Japanese mounted bandits to create a cause for the execution of the operation. However, the above view is based on some data without sufficient verification, so there is plenty of room for further consideration. In response, this study intended to criticize the conventional view through criticism and verification of historical facts of the incident and The Japanese Army's decision-making process on Kando invasion, and provide a new perspective on the historical facts of the ‘Hunchun Incident’ and the ‘Kando Intervention’ of Japanese Army. Since the March 1st Movement in 1919,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and the Japanese Army of Korea(朝鮮軍) have been wary of armed anti-Japanese groups. In response, the Japanese military issued 'the Instruction on the operation against Futei Senjin(對不逞鮮人作戰ニ関スル 訓令)' in 1919 to destroy them. At the same time, they were negotiating with China to suppress anti-Japanese troops. From 1920, Japan began to engage in full-scale negotiations with the Northeast Chinese authorities, including Zhang Zuolin(張作霖), then the Governor-General of the Three Eastern Provinces(東三省巡閱使), to force them to investigate and eradicate the anti-Japanese forces, and to request a Sino-Japanese joint investigation. Meanwhile, Zhang Zuolin, who had been facing a showdown with the Zhili clique(直隸軍閥), has been cooperating with Japan to win Japan's sponsorship. In the end, he promised to condone the Japanese invasion of Kando province. Thanks to the compromise with Zhang Zuolin, the Japanese Army of Korea set up the 'Punitive expedition plan on Futei Senjin in Kando province(間島地方不逞鮮人剿討計劃)' which is the basis of its operation to dispatch troops to Kando, and proceeded with preparations for the invasion of Kando However, the Japanese government and the Foreign Ministry, which wanted to ease the economic and political burden of the ‘Invasion of Siberia’, were opposed to the Japanese military's dispatch because they did not want diplomatic problems anymore. Thus, despite the fact that negotiations with Zhang Zuolin allowed the Japanese military to participate in the Japanese invasion of Kando, the Japanese Army of Korea was not able to carry out the operation. In September and October 1920, the First and Second ‘Hunchun Incident’ broke out. In light of the situation in China at that time, this study suggests that the ‘Hunchun Incident’ was no different from the general bandit assault incident, not the one caused by instigation of Japanese Empire. In 1920, there was a prolonged war between warlords in China. As a result, Manchuria was mired in economic collapse and political turmoil, which brought about a vacuum in the security of Manchuria. The ‘Hunchun Incident’ was one of the countless banditry raids that took place in this situation. Examining activities of banditry leaders, Wan Shun(萬順) and Zhan Dong(戰東), their purpose of the raids is believed to have been to acquire loot and hostages, while also trying to destroy the city and bring disaster to the region to show off their dignity. The trace showed by them was just like the images of 'soldier-bandits(兵匪)' across China in the early 1920s. Meanwhile, the fact that the Japanese consulate was burned and many Japanese government officials and civilians were killed during the ‘Second Hunchun incident', and the information that Koreans and Russians were involved in it, were favorable information to emphasize the need for the Japanese military to dispatch the Japanese military to the Kando region. By actively utilizing this information, the Japanese Army of Korea promoted the 'Hunchun Incident' as the 'secundus Nikolayevsk Incident', prompting a sense of crisis in Japan's officials and people, and as a result, it was able to draw a surprise approval from the Japanese government. This enabled the Japanese military to push ahead with its plan to invade Kando, which had been planned since 1919. Meanwhile, the actions taken by the Japanese military, which defined the anti-Japanese troops as Partizan, turned out to be a tragedy called 'Kyungsin Catastrophe(庚申慘變)'. The ‘Kyungsin Catastrophe’ had already been designated since the beginning of the Kando troop dispatch plan, and the ‘Hunchun Incident’ provided only justification for implementing the plan. Japanese military gave their reason of dispatch on the protection of Japanese residents, but they actually abandoned their duty of care, rescue and relief, only devoted theirselves to the suppressing against the anti-Japanese army and the destruction of the Korean community. Their actions in Kando were tantamount to a repeat of the 'April Catastrophe(4월참변)' committed in the Maritime Province of Siberia. The ‘Kando Intervention’ of Japanese Army(1920) and ‘Kyungsin Catastrophe’ were the disaster which created by the Japanese military and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by taking advantage of the sense of crisis and political chaos in China.

한국어

본고는 일제가 1920년 이른바 ‘間島出兵’을 실행하기 위해 마적을 사주 하여 ‘琿春事件’을 일으켰다는 통설의 관점을 재검토하고 새로운 시각으 로 혼춘사건과 ‘간도출병’의 역사적 경위를 밝히는 것을 시도한 연구이 다. 현재까지의 연구는 혼춘사건은 일제가 ‘간도출병’ 작전 실행의 명분 을 만들기 위해 친일 마적을 사주하여 일으킨 사건이라는, 이른바 ‘혼춘 사건 사주설’의 관점을 견지해왔다. 하지만 상기의 관점은 충분히 검증되 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검토해볼 여지가 충분하다. 이에 본고는 사료 비 판과 검증을 통하여 해당 관점을 비판하고, 혼춘사건과 일본군의 간도 침 공 결정 과정을 규명하여 혼춘사건과 일본군의 ‘간도출병’의 역사적 실체 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고자 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래로 조선총독부 및 조선군은 간도에서 활동하는 무 장 항일단체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이에 조선군은 그들을 섬멸하기 위하 여 1919년에 「對不逞鮮人作戰ニ関スル訓令」을 발표하였다. 그와 동시에 중국과 교섭하여 항일부대를 탄압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1920년부터 일본은 당시 東三省巡閱使 張作霖을 비롯한 동북지방 중 국관헌들에 대한 교섭을 본격적으로 진행하여 그들에게 항일부대에 대 한 수사와 토벌을 강요하고 中日協同搜査를 요청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直隸軍閥과의 대결을 앞두고 있었던 장작림은 일본의 후원을 받기 위해 일본에 최대한 협조적인 모습을 보여 왔고, 결국 일본군의 간도 침입을 묵인해준다는 약속을 하였다. 장작림과의 타협에 힘입어 조선군은 ‘간도 출병’ 작전의 근간인 「間島地方不逞鮮人剿討計劃」을 세우고 간도 침공을 위한 준비를 진행해나갔다. 하지만 ‘시베리아 출병’의 경제적, 정치적 부담을 떨치고 싶어 했던 일 본 정부와 외무성은 더 이상 외교적 문제가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군의 출동을 반대하고 있었다. 따라서 장작림과의 교섭으로 일본군 간도 침입에 대한 묵인이 이루어졌음에도 조선군은 간도 침공 작 전을 실행할 수 없었다. 이런 가운데 1920년 9월과 10월에 ‘1차 혼춘사건’과 ‘2차 혼춘사건’이 발발하였다. 본고는 당시의 중국의 상황을 비추어 봤을 때, 혼춘사건이 일제가 마적을 사주하여 일으킨 사건이 아니라 일반적인 마적 습격 사건 과 다름없었다는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1920년 당시 중국에서는 군벌 간의 전쟁이 장기간 지속되고 있었다. 그로 인해 간도 지방은 경제적 파 탄과 정치적 혼란에 빠져있었고, 그것은 만주 지방의 안보의 공백을 가져 왔다. 혼춘사건은 이런 상황 속에서 일어난 무수한 마적 습격 사건 중 하 나였다. 마적 만순(萬順)과 전동(戰東)의 행동을 살펴보면 그들의 혼춘 습 격 목적은 약탈품과 인질을 획득하는 한편 도시를 파괴하고 일대에 재난 을 일으켜 자신의 위엄을 과시하려고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그들이 보인 모습은 1920년대 초 중국 전역에서 나타난 ‘兵匪’의 모습과 다름없 었다. 한편 2차 혼춘사건으로 일본 영사분관이 焚燒되고 다수의 일본관헌과 민간인이 희생되었다는 사실과 거기에 조선인과 러시아인이 개입되었다 는 정보는 일본군에게 있어 간도 침공 작전의 필요성을 강조하기에 유리 한 정보였다. 조선군은 이 정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혼춘사건을 ‘제2의 니콜라옙스크 사건‘으로 선전하여 일본 조야에 위기감을 부추겼고, 그 결과 일본 정부의 전격적인 출병 승인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이로써 조 선군은 1919년부터 계획해왔던 간도 침공 계획을 추진해나갈 수 있었다. 한편 항일부대를 빨치산으로 규정한 일본군이 취한 행동은 ‘庚申慘變’ 이라는 비극으로 나타났다. 경신참변은 ‘간도출병’ 계획 단계에서부터 이 미 내정되어 있었던 것이었고, 혼춘사건은 그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명분 을 제공했을 뿐이었다. 일본군은 그들의 출병의 명분으로 거류민의 보호 를 앞세웠지만 실제로는 거류민 보호의 의무와 구출, 구제의 의무를 방기 하고 항일부대의 초토와 한인사회에 대한 공격에만 몰두하였다. 그들이 간도에서 벌인 행동은 연해주에서 자행된 ‘4월참변’의 만행을 간도에서 되풀이한 것과 다름없었다. ‘간도출병’과 경신참변은 조선총독부와 일본군이 당시 일본이 가지고 있던 위기의식과 중국의 정치적 혼돈을 이용하여 일으킨 참변이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혼춘사건 이전 中‧日의 동향
Ⅲ. 혼춘사건의 실상
Ⅳ. ‘간도출병’의 결정과정
Ⅴ.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요약
Abstract

저자정보

  • 장성규 Chang, Sung-kyu. 한양대학교 사학과 석사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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