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A Study on The Independence Movement of Lee In-Sik(李仁植) from Im-Pi(臨陂)
초록
영어
The family of Lee In-Sik(李仁植) from Im-Pi(臨陂) was the family of JeonJuI(全州 李), who served as Hyangri(鄕吏) for more than 400 years after his 14th generation ancestor, Ewha(李華), moved to the region of Im-pi County in the middle of the 16th century. Lee In-sik was born as the youngest of three sons and two daughters between Lee Tae-Ha(李泰河) and KimJeJoSsi(金堤趙氏). When he was young he entered Im-Pi General School after Chinese education, and graduated for the second time in early 1914. In 1916, he entered the private BoSeong General School(寶城中學校) in Seoul, and was married to GaRimChoSsi(嘉林趙氏) who lived in the Ham-Yeol(咸悅) area. At that time, a marriage relationship was formed between Lee's family and Cho's family. During the March 1st Movement(三一運動) in 1919, Lee In-Sik participated in the hurray as a representative of Bosung Middle School. He led a protest crowd toward the US Embassy as a Jeonbuk(全北) student representative. In November 1919, he was sentenced to seven months of imprisonment calculated and summed 90 days of undetained detention and three years of probation. In 1920, he went to Manchuria, at his own risk, donated 8,000 won of his property to an agent of the temporary government(臨時政府) and received national bonds(愛國 公債). In 1923, he enrolled in the Department of Indiana Philosophy of the DongYang (東洋) University in Japan, organized GumUHoi(錦友會), produced monthly papers and distributed them to Korean students in Tokyo(東京). In 1928, he donated funds to the night school at the Im-pi area and a group of boys bands at the Im-pi General School. In 1929 later, he moved to the Manchurian MogDan River(牧丹 江) basin for independence, including collecting information and raising military fund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Lee In-sik lived a life of constant struggle for the liberation of his country, which emerged from his attitude to life that emphasized endurance and effort.
한국어
이인식의 가문은 그의 14대조 이화가 16세기 중엽에 임피현으로 이주한 이후 400여 년 동안 대대로 향리 직을 역임한 전주이씨 시중공파 문정공파 가문이었다. 이인식은 이태하와 김제조씨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한학을 공부한 이후 임피 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 초에 제2회로 졸업하였 다. 1916년에 서울의 사립 보성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함열의 가림 조씨 조득과 조혼하였다. 당시 이인식의 집안과 함열의 가림 조씨 집안 사이에서는 연혼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인식은 1919년 3월 1일 당시 보성중학교 학생 대표와 전북 학 생 대표로서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탑골 공원 만세 시위 때에는 독립선언서를 배부하고 군중들을 미국 영사관 방향으로 유도하였고, 그 날 밤에는 독립신문을 배 부하였으며, 3월 5일 남대문 시위 때에는 붉은 깃발을 흔들며 시위를 독려하였다. 이후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1919년 11월에 미결 구류 일수 90일을 산입한 징 역 7개월과 집행유예 3년이라는 선고를 받았다. 1920년에는 자신의 재산 거금 8천 원을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만주에까지 가서 임시정부 요원에게 건네주고 애국 공채를 받아왔다. 1923년에는 일본 동양대학 인도지나 철학과에 입학하고 금우회 를 조직하여 월보를 만들어 회원들에게 배포하였다. 1925년에는 임피 지역의 중학 기성발기회에서, 1927년에는 임피 지역 청년회의 혁신총회에서 각각 회계와 경리 로서 활약하였고, 1928년에는 임피 지역 야학에 의연금을 정기적으로 기부하였으 며, 임피 보통학교에 소년 악대(樂隊) 1조를 기부하였다. 1929년 이후의 어느 시기 에는 만주 목단강 유역으로 가서 조국의 독립을 위한 정보 수집, 군자금 조달 등의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토록 이인식은 일제 강점기에 조국 광복을 위해 끊임없 이 일제에 저항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한 그의 삶의 기저에는, 인내와 노력을 중시 한 그의 인생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목차
1. 머리말
2. 가문과 초‧중등 교육 및 혼인
1) 가문
2) 초‧중등 교육
3) 혼인
3. 독립운동
1) 3‧1만세 운동 참여
2) 임정에 독립 자금 기부
3) 일본에서의 금우회 활동
4. 임피에서의 실력 양성 운동
5. 만주 목단강에서의 독립 운동
6. 삶에 대한 자세
7. 맺음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