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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영암의 達梁浦, 達梁鎭, 古達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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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lryangpo, Dalryangjin, and Godalryang in Yeongam, Jeolla Province

전라도 영암의 달량포, 달량진, 고달량

김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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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Dalryang in Yeongam, Jeolla Province was situated at the defense strategic point of Daldo and Ijin as its supportive ports in the front and west, respectively. Dalryang had a dense population, developed fishery and commerce, and witnessed many ships coming and going. The royal court of Joseon established Manhojin in Dalryang, but it was degraded to Gwongwanjin after Garipojin was newly installed in Wando, Jeonbang in 1522(17th year of King Jungjong's reign). Under this condition, even Gwongwanjin was abolished after Jinseong was captured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in the year of Eulmyo in 1555 (the first year of King Myeongjong's reign). After the naval post was abolished, Dalryang had its name changed to Godalryang with its economic and cultural roles amplified. As a consequence, the Godalryang port witnessed the entry and exit of ferryboats sailing to Wando, merchant ships sailing everywhere, grains ships heading to Seoul, and Gongmu ships sailing to Jejudo. In addition, armored ships were anchored as the Seonso of Yeongam with military officer-turned managers dispatched. Regional markets were formed, and Ijinchang (Namchang) responsible for the management of Hwangok from four myeons was installed and operated by Gamgwans and Saekris. Naturally, accommodation and adult entertainment businesses developed, which means that Godalryang contributed to the vitalization of local economy. After enjoying its heyday, Godalryang was put under the jurisdiction of Haenam during the arrangement of Wolgyeongji in 1906.

한국어

전라도 영암의 달량은 국방상 요충지에 위치한 포구로서 전방에 달도, 서쪽에 이진을 배후 포구로 두었다. 그리하여 달량은 인구가 조밀하고, 어업·상업이 발달하고, 선박이 왕래하는 곳이었다. 이곳에 조선왕조는 만호진을 설치하였지만, 1522년(중종 17) 전방 의 완도에 가리포진이 신설되면서 권관진으로 강등되었다. 이 상태에서 1555년(명종 1) 을묘왜변을 맞고 진성이 함락된 후 권관진마저 혁파되고 말았다. 수군진 혁파 후 달량은 고달량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그와 함께 경제·문화적 역할이 증대되었다. 그 결 과 고달량 포구에 완도를 오가는 진선, 곳곳을 누비는 상선, 서울로 향하는 세곡선, 제주 도를 오가는 공무선이 출입하였다. 그리고 영암 선소로서 군선이 정박하고 군관 출신의 관리자가 파견되었고, 장시가 들어섰고, 4개 면 환곡을 관리하는 이진창(남창)이 설치되 어 감관·색리에 의해 운영되었다. 자연스럽게 숙박업이나 유흥업도 발달하여 고달량은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였다. 이러한 고달량도 1906년 월경지 정비 때 해남으로 이속 되어 오늘에 이른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 달량포란?
Ⅱ. 달량진의 설치
1. 萬戶鎭에서
2. 權管鎭으로
Ⅲ. 달량진의 혁파
1. 乙卯倭變
2. 달량진 함락·혁파
Ⅳ. 고달량과 지역경제
1. 場市와 候風所
2. 船所와 梨津倉(南倉)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저자정보

  • 김덕진 Kim, Deok-Jin. 광주교육대학교 교수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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