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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시대 도시 하얼빈의 한인이주 - 점이지대의 망국민과 신민 -

원문정보

Korean Migration in Harbin during the Imperial Age

김주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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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Before liberation, Harbin, a Chinese city, was recognized by Koreans as a city of Ahn Jung-geun and a European country in Asia. It was recognized by the Chinese as a space where culture was transplanted, and Japanese imperialism was being used as an information source for the invasion of the continent. Harbin was the work of Dongjin, a Russian representative. The relocation of Koreans to this area was due to the construction of the so-called Dongcheong Railway. In 1909, during the Ahn Jung-geun’s reign, Koreans who migrated mainly through Russia's Maritime Province were the mainstream of the Harbin Korean community. Koreans who moved to Harbin in the 1920s mostly lived in docks and had many jobs. The Manchurian Incident of 1931 brought a great change to the Korean immigrants. The Chinese soldiers who were damaged by the Japanese army looted Korean villages, and the refugees moved to the cities. Harbin was like a huge camp. The refugees who temporarily stayed in the city of Harbin returned to the countryside, but the rest of them were forced to live on the lowest floor of Harbin. The Japanese established a special mission (secret and spy) in Harbin, and the special mission produced in Harbin carried out secret activities throughout Manchuria. The independence activists who devoted themselves to the independence movement until the 1920s were imprisoned by the Japanese and secretly monitored the Korean community.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gave them the function of monitoring and controlling the Korean community, and during the Manchukuo period, the Korean community was forced to accept subservience, resistance, surveillance and control under the guise of five-legged cooperation.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s precarious qualification as second-class citizens was also being forced to use the identity of Koreans as collateral.

한국어

해방 전 중국 도시 하얼빈은 한국인들에게는 안중근 의거의 도시이자 아시아의 유럽 으로 인식되었던 곳이다. 중국인들에게는 문화가 이식된 공간으로 인식되었으며, 일본 제국주의는 대륙 침략의 정보원 인재 개발 지역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하얼빈은 동구 의 대표주자였던 러시아 동진의 작품이었다. 이 지역에 한인이 이주하게 된 것은 이른 바 동청철도가 부설되면서이다. 안중근 의거 당시였던 1909년에는 주로 러시아 연해주 를 통해서 이주한 한인들이 하얼빈 한인사회의 주류였다. 1920년대 하얼빈에 이주했던 한인들은 주거지는 대부분 부두구였으며, 직업도 부정업이 많았다. 1931년 만주사변은 이주한인들에게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일본군에게 피해를 입은 중국군은 한인 마을을 약탈하였으며, 피난민들은 도시로 이주하였다. 하얼빈은 거대한 수용소와도 같았다. 도시 하얼빈에 일시적으로 머문 피난민들은 다시 농촌으로 돌아갔지만 남은 자들은 하얼빈의 최하층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는 하얼빈에 특무(밀정, 스파이) 학료를 설립하였고, 하얼빈에서 배출된 특무는 만주지역 전역에서 밀정활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대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독립 운동가들은 일제에 피체된 후 馴致되어 밀정으로 한인사회를 감시하였다. 일제는 이들 에게 한인사회에 대한 감시와 통제 기능을 부여하였으며, 만주국 시기 한인사회는 굴종 과 저항, 감시와 통제를 오족협화라는 미명 하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일제가 부여 한 위태로운 이등공민의 자격 역시 한인의 정체성 변용을 담보로 강요되고 있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동청철도와 도시 하얼빈의 성립
Ⅲ. 만주국 성립 전 한인사회
Ⅳ. 만주국과 한인사회의 확장
Ⅴ. 망국과 신민의 실상
Ⅵ.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저자정보

  • 김주용 Kim Joo Yong.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 교수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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