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영어
In addition to the literature, letters on stones said that the founder of Goguryeo came down from Buyeo. Although the record has been trusted without doubt, it has been argued that it is only a one-sided record of the Goguryeo people. A key rationale for this view is that if the Goguryeo founder had applied for the project in Buyeo, the Buyeo tomb form should have been built on Goguryeo land, but only a tomb stowed with stones, an indigenous tomb, was created in the Goguryeo kingdom. It reflected not only the identity of the founder, but also the fact that there was no change or coercion in the conservative tomb. Furthermore, it applied the wage theory from outside Marshall Sahlins that the Founders made their way into the outside world. However, we cannot follow the theory of the indigenous people of the Goguryeo founder of Goguryeo. The claim that the founder of Goguryeo applied from Buyeo is also agreed by Baekje, which was the arch-enemy of Goguryeo. Furthermore, according to Sahlin's theory, when strangers integrate with indigenous people, “the whole group is named after indigenous, subordinate subgroups.” Sahlins said that this method of classification expresses “a king's consent in a kind of reverse-name method in which the title of social underdogs becomes the general concept of the whole.” In this context, the founders of Goguryeo also adopted tombs for indigenous people. And in Sahlin's theory, power and territory are inherited through marriage. Similarly, the founder of Goguryeo was reconciled to the region by marrying a powerful woman of indigenous power. Through Sahlin's theory, the founder of Goguryeo could rather prove his application from Buyeo, the outside world.
한국어
문헌 뿐 아니라 금석문에서는 고구려 건국 세력이 부여에서 내려왔다고 하 였다. 이 기록을 의심 없이 믿어 왔지만, 고구려인들의 일방적인 기록에 불과 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렇게 간주하는 핵심적인 근거는 고구려 건국 세력이 부여에서 출원했다면, 부여 묘제가 고구려 땅에서 조성되었어야 하지 만, 고구려 건국 지역에서는 토착 묘제인 적석총만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건 국 세력의 정체성을 반영할 뿐 아니라 보수성을 지닌 묘제상의 변화나 강요 가 없었다는 점에 착목하였다. 게다가 건국 세력을 외부 세계에서 진입한 것 으로 만들었다는 마샬 살린스(Marshall Sahlins)의 외래왕 이론을 적용했다. 그러나 이에 근거한 고구려 건국 세력의 토착민 설은 따를 수 없다. 고구 려 건국 세력이 부여에서 출원했다는 주장은, 고구려의 앙숙이었던 백제에서 도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살린스 이론에 따르면 이방인이 토착민 과 통합했을 때 “집단 전체의 명칭은 토착의, 종속하는 하위집단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다”고 했다. 살린스는 이러한 분류 방법을 “사회적 약자의 호칭 이 전체의 일반적인 개념이 되는 일종의 역명명법으로 왕의 同化”를 표현해 준다고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고구려 건국 세력도 토착민의 묘제를 채용한 것이다. 그리고 살린스의 이론에서 혼인을 통해 권력과 영토를 물려받는다고 했다. 이와 마찬 가지로 고구려 건국 세력도 토착 세력의 힘 있는 여성과 혼 인함으로써 그 지역에 융화되었던 것이다. 살린스 이론을 통해 오히려 고구 려 건국 세력은 외부 세계인 부여에서 출원했음을 입증할 수 있었다.
목차
Ⅱ. 부여 출원설에 대한 반론과 외래왕 이론
1. 문헌을 통한 반론
2. 묘제를 통한 반론과 외래왕 이론
Ⅲ. 고구려 건국 세력의 부여 기원설 검증
1. 고구려 건국자의 권력 장악 방식과 외래왕 이론
2. 외래왕 이론을 통한 부여 출원설 입증
Ⅳ. 맺음말
<국문초록>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