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영어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examine the perception and recognition of Dokdo on the annexed islands of Ulleungdo through the formation and change of the socio-economic structure of the modern Ulleungdo from the 「Ulleungdo Exploring Order(1882)」 to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e following were reviewed in this article. First, the Japanese who infiltrated Ulleungdo again in line with the Japanese imperialism's migrant fishing village policy were mainly aimed at cutting logging in the early days, but gradually changed into the form of obtaining income sources through the collection of fishery resources as the abalone, sea lion, and squid catching were spread in the 1900s. Second, the momentum for Japanese immigration to Ulleungdo began after the Fishery Agreement between Japan and Choseon in 1889 and the Sino-Japan War in 1895, and the Meiji government's policy of immigration and fishing for the advancement of the continent was the background. In addition, the Japanese population on Ulleungdo has dramatically increased since the introduction of Sado-style squid fishing on Ulleungdo in 1903. The introduction of squid fishing was a source of income to replace conventional wood income, which led to the Japanese migrant fishing village settlement and the Japanese population on Ulleungdo was rapidly increased around 1910. Third, the vested interests of Ulleungdo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such area as management, administration, education, police, commerce, and fish processing, etc., were established by Japanese economic fishing activities, and it is also a modern history of Ulleungdo to show typical cases of colonial rule and exploitation. Dokdo was on route to serve as a target for these voyages. According to their recognition of Dokdo, the name of Dokdo, which was called Riankodo, was officially named at the time, but the name of Dokdo as Matsushima, which was called from the Sannin region, was used as it was. Fourth, as migrant fishing villages settled in Ulleungdo, the residents of Sannin region mainly accounted for more than 70 percent of Japanese residents, and a direct route called Ulleungdo-Okisushima-Sakaiminato was opened as a route to Japan. Dokdo was on route to serve as a target for these voyages. According to their recognition of Dokdo, the name of Dokdo, which was called Riankodo, was officially named at the time, but the name of Dokdo as Matsushima, which was called from the Sannin region, was used as it was. This means that the fishermen of Sannin coastal area have used Songdo(Matsushima) more customarily than the new name Riankodo even in modern times. And Dokdo(Songdo) is a place where many abalones are catched, so many people come from Ulleungdo, the main island, and they usually stay for 4 ~ 5 days and return to the main island (Ulleungdo). In other words, it is said that the Dokdo fishery was carried out with Ulleungdo as its base, and that the fishing activities were carried out from Ulleungdo, which is much closer and safer than Ulleungdo than Oki Island (157km) at that time.
한국어
본 연구의 목적은 「울릉도개척령(1882)」 이후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근대기 울릉도 사회경제 구조의 형성과 변화과정을 통해 울릉도의 부속섬 독도에 대한 인식 및 인지를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이글을 통해 검토된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제국주의의 이주어촌정책과 맞물려 다시 울릉도로 잠입한 일본인들은 초기에는 주로 벌목의 채벌을 주된 목적으로 하였으나, 1900년대로 접어들면서 점차로 전복채취, 강치어렵, 오징어잡이 등이 보급되면서 수산자원의 채취를 통해 소득원을 얻는 형태로 변화하였으며, 이는 울릉도 경제의 성장과 더불어 인구 증가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둘째, 울릉도에 일본인 이주가 본격화되는 계기는 1889년 조일통어장정과 1895년 청일전쟁 이후부터이며, 이는 메이지 정부의 대륙진출을 위한 이주어촌 정책이 배후에 작용하고 있었다. 또한 울릉도의 일본인 인구가 비약적으로 늘어나는 것은 1903년 울릉도에 사도식(佐渡式) 오징어어업을 도입하면서부터였다. 오징어어업의 도입은 종래의 목재 소득을 대체하는 소득원이었고 이로 인해 울릉도의 일본인 이주어촌은 정착단계에 접어들었고 1910년을 전후하여 울릉도의 인구가 다시 급속히 늘어났다. 셋째, 어업활동이라는 경제행위를 매개로 관리와 행정, 교육, 경찰, 상업, 가공업 등 일제강점기 울릉도의 기득권층은 일본인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식민지 지배와 수탈이라는 전형적인 사례를 보여주는 것이 울릉도의 근대사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재의 울릉도의 산업구조를 있게 한 긍정적인 부분과 울릉도의 임산자원 황폐화 및 어족자원의 수탈이라는 부정적인 부분을 함께 지니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넷째, 울릉도에 이주어촌이 정착하면서 주로 산음지방 출신자들이 일본인 거주자들의 7할 이상이나 차지하였고, 일본으로의 항로로 ‘울릉도-오키섬-사카이미나토’ 라는 직항로가 개설되었다. 그 도정에 있는 독도는 이들 항해의 표적 역할을 하였다. 이들의 독도 인지를 보면, 당시 새롭게 유입된 량코섬(リャンコ島)이라는 호칭을 공식명칭으로 하면서도 산음지방에서 예전부터 부르던 독도의 명칭 송도(松島)가 그대로 사용되고 었었다. 이는 산음 연해지방 어민들이 근대에 들어와서도 새로운 명칭 량코섬보다는 송도를 관습적으로 써왔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독도(송도)는 전복이 많이 나는 곳이어서 본도인 울릉도에서 출어하는 사람이 많았으며, 이들은 주로 4~5일간 체류하다가 본섬(울릉도)으로 돌아오는 식의 출어를 하였다. 즉 본도인 울릉도를 거점으로 하여 독도로의 출어활동을 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당시 독도로의 출어가 오키섬(157.5km)보다 훨씬 지근거리이고 안전한 울릉도를 기점으로 하여 어로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어
本研究の目的は、「鬱陵島開拓令」(1882)以来、日本の植民地支配期にいたるまでの、近代における鬱陵島社会経済構造の形成と変化の過程を通じ、鬱陵島の付属島である独島についての認識及び認知を考察することである。本稿で検討されたことは、次のとおりである。 第一に、日本帝国主義の移住漁村政策とあいまって、鬱陵島へ潜入した日本人は、初期は主に伐採を目的としたが、1900年代に入るとアワビ採取、あしか猟、イカ漁などが普及し、水産資源の採取により所得源を得る形態へと変化し、これは鬱陵島経済の成長とともに人口増加の要因として作用した。第二に、鬱陵島への日本人移住が本格化するきっかけは、1889年の朝日通漁章程と1895年の日清戦争以後からであり、これは明治政府の大陸進出のための移住漁村政策が背後に作用していたといえる。また、鬱陵島の日本人人口が飛躍的に増えたのは、1903年に鬱陵島に佐渡式イカ漁業を導入してからである。イカ漁業の導入は、従来の木材所得に代わる新しい所得源であり、これによって鬱陵島の日本人移住漁村は定着段階に入り、1910年前後に鬱陵島の人口が再び急速に増えるようになった。第三に、漁業活動という経済行為を媒介に、管理と行政、教育、警察、商業、加工業など植民地時代の鬱陵島の既得権層は、日本人によって形成され、植民地支配と収奪という典型的な事例を示すのが鬱陵島の近代史でもある。しかし、現在の鬱陵島の産業構造を実現させた肯定的な部分と、鬱陵島の林産資源の荒廃化および魚族資源の収奪という否定的な部分を併せて持っているものでもある。第四に、鬱陵島に移住漁村が定着し、主に山陰地方出身者が日本人居住者の7割以上を占め、日本への航路として「鬱陵島-隠岐島-境港」という直航路が開設された。その道程にある独島は、これらの航海の目標の役割をした。 これらの独島認識を考えると、当時、新たに流入されたランコ島(リャンコ島)という呼称を公式名称にしながらも、山陰地方で以前から使っていた独島の名称松島がそのまま使用されていた。これは山陰の沿海地方の漁民が近代に入ってからも、新しい名称の「ランコ島」より、松島を慣習的に使ってきたことを物語っている。そして独島(松島)はアワビがたくさん産する所なので、本島の鬱陵島から出漁する人が多く、彼らは主に4~5日間滞在してから、本島の鬱陵島にもどる形の出漁をしている。つまり本島の鬱陵島を拠点にして独島への出漁活動をしていたことを物語ってくれるもので、当時、独島への出漁が隠岐島(157.5km)よりはるかに至近距離で安全な鬱陵島を起点として漁撈活動が行われていたことを知ることができる。
목차
Ⅰ. 머리말
Ⅱ. 울릉도 사회경제 구조의 변천
1. 개척령~1900년 울릉도 사회의 형성과정
2. 1900~1910년 울릉도의 사회경제 구조
3. 1911~1945년 울릉도 경제와 사회조직의 변화
Ⅲ. 울릉도민의 경제활동과 독도 인식
Ⅳ. 맺음말
<참고문헌>
要旨
Abstr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