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奇正鎭의 고창지역 門人과 遺物遺蹟에 대한 一攷

원문정보

A study on Gi Jeong-jin’s disciples and antiquities in Gochang region

기정진의 고창지역 문인과 유물유적에 대한 일고

이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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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Gi Jeong-jin(奇正鎭) devoted himself to studies in Jangseong, Jeolla Province in late Joseon and fostered younger scholars. He spent the summer at Namam(Buddhist hermitage), Munsusa Temple in Gochang(高敞) bordering Jangseong, practicing his studies and going sightseeing at Seonunsa Temple as well. At the age of 46, he drafted Napryangsaeui(納凉私議) at Namam and also made it into a poem, ruminating over Neo-Confucianism of former scholars. Scholars in Gochang region were both directly and indirectly inspired by his studies and sought learning under him. According to a research to inspect disciples in Gochang region, their number was as many as 121 disciples. Among them, 28 were to train younger students, write books or explore antiquities and relics, etc. Academically affected by their master, they tried to pursue studies while intellectually interacting in their regional community in order for actively responding to influences of the West and of the Japanese. In the pursuit of his study, Gi Jeong-jin visited historic sites and pavilions in Gochang region, writing poetry and documentary literatures. His viewpoint of munyijaedo(文以載道, which means literature is a means to deliver the truth) to seek the truth is within his poetry. In conclusion, Napryangsaeui written in Gochang served as a foundation to make Gi Jeongjin praised as the last Neo-Confucian master of Joseon. His Neo-Confucian idea did not remain a theory but did observe loyalty of Chunqiu spirit(春秋義理) at times of crisis, which left not a few scholars behind. The scholars in Gochang region accepted their teacher’s ideas and pursued anti-Japanese movement for which Gochang is currently called home of righteousness(義鄕).

한국어

기정진(奇正鎭)은 조선말기 전라도 장성에서 학문을 닦으며 후학을양성하였다. 여름날에는 장성과 경계를 이룬 고창의 문수사 남암(南庵) 으로 피서하여 병을 다스리며 그곳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또한 호연지기를 기르기 위해 선운사와 불갑사를 유람하기도 하였다. 46세 때에는 그곳에서 이전 학자의 성리학을 반추하며 「납량사의(納 凉私議)」 초고를 지은 다음, 그 내용을 시 두 수로 짓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고창지역의 학인들은 장성으로 가서 수학하거나, 기정진이 고창지역으로 내왕할 적에 찾아 학문을 닦기도 하였다. 연원록(淵源 錄)과 읍지(邑誌) 등을 통해 그의 문인을 조사한 바, 고창지역의 문인은총 121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28명은 후학을 양성하거나, 저서 및 유물유적 등이 있다. 이들은 스승의 학문적 영향을 받아 강학(講學)에 힘쓰면서 외세에 대응하려는 면도 적지 않았다. 특히 누정이 있는 문인들은 가학(家學)을 통해 지역사회의 여러 학인들과 교류하며 서로의 학문적 동질성을 강화시키고 춘추의리(春秋義理)를 지켜 나갔다. 기정진도 문인들의 직간접적 영향을 받아 고창지역의 유서 깊은 유적과 누정을 찾아 시(詩)를 짓고 기문(記文)을 짓기도 하였다. 시로는 조선중기의 변성온(卞成溫)과 변성진(卞成振) 형제의 은일적(隱逸的) 처사의삶을 읊거나, 정회찬(鄭悔燦)이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누정에 대한시를 짓기도 하였으며, 누정 기문으로는 술에 취한다는 ‘취(醉)’ 글자를우의적(寓意的) 측면에서 학문연찬과 제자훈도의 정신을 기술한 「취석정기(醉石亭記)」,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참다운 공덕(功德)을 통해 선조를 드러내려는 숭조의식(崇祖意識)을 칭송한 「노동박씨신정기(蘆洞朴氏 新亭記)」(일명: 「梅月亭記」), 제자 조의곤(曺毅坤)의 호 ‘동오(東塢)’에서‘동(東)’ 글자를 그저 남들이 가리키는 동쪽의 ‘동’이 아니라 모든 만물이奇正鎭의 고창지역 門人과 遺物遺蹟에 대한 一攷 191 생성되는 ‘동’으로 간주하여 자신의 주체적 의식을 갖도록 권면한 「동오기(東塢記)」가 있다. 이러한 시문은 참된 도를 지향하도록 하기에 성리학에서 주창하는 문이재도(文以載道)의 관점이 깃들어 있다. 결론적으로, 기정진이 고창에서 지은 「납량사의」는 그가 조선 성리학의 마지막 거장으로 칭송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의 사상체계는 그저이념에 머물지 않고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에 춘추의리를 지키는 원동력이 되어 많은 문인들이 운집하였다. 고창지역의 기정진의 문인과 그 후학들 역시 이러한 사상과 춘추의리를 수용하여 항일운동(抗日運動)을 도모하였기에 현재 고창을 의향(義鄕) 이라 호칭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목차

<논문 요약>
Ⅰ. 들어가는 말
Ⅱ. 기정진의 고창지역 來往과 治病硏學遺蹟
Ⅲ. 고창지역 기정진 문인 조사와 개별 현황
Ⅳ. 기정진의 고창지역 樓亭記와 懸額
Ⅴ. 맺는 말
<참고문헌>
[부 록] 고창지역 기정진 문인 조사
Abstract

저자정보

  • 이형성 Lee, Hyung-sung. 전남대학교 철학연구교육센터 학술교수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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