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영어
This thesis considers Kim Ok-Kyun’s traces around the Gapsin Coup focusing on Ziji Shinpou by Fukuzawa Yukichi. This work reveals Kim’s status recognized by the Japanese at that time, and reviews the recognition and comments on the issue how Kim and international situation surrounding Chosun were reported, represented and criticized through mass media like newspapers in Japan. Fukuzawa Yukichi introduced Kim Ok Kyun and the Enlightenment Party in the editorial of Ziji Shinpou, mentioning the process of the Gapsin Coup and its failure in 1884. Fukuzawa criticized Kim because Kim insisted Independence from the Qing Dynasty in China. Fukuzawa regarded Confucianism of Chosun and the Qing Dynasty as uncivilization considering the international situation at that time. The situation had turned urgent under the European civilization and Imperialism. Fukuzawa suggested Japan should escape from Asia and enter the Europe, and demanded the integration and unity of the Japanese. Also, Fukuzawa reported Kim’s traces around the Osaka incident or banishment to the island of Ogasawara for 10 years since Kim refuged in Japan, which aroused the sensation about Kim both in Chosun and China. At the same time, his writing showed the criticism on the Japanese government for the reason of passive position toward both country. Besides, the news that Kim was assassinated by Hong Jong-Wo in Shanghai in 1894 and the report about the condolence Japanese politicians and people expressed clearly showed Kim’s thought and humane qualities as well as Kim’s status. On the other hand, however, Fukuzawa criticized irrationality of both countries over the treatment after Kim died, which offered the theoretical grounds on which Japan invaded into them, and contributed to form this public opinion. As a result, Japan started the Sino-Japanese War in 1894. Kim Ok-Kyun’s thought and awareness of the times, however, influenced on the Japanese deeply. Especially, Kim’s Sanwa-shugi(三 和主義), the argument that three countries of Chousun, Japan, and China should cooperate and defeat the Western powers, definitely represent Kim as the modern thinker who intended to lead for Oriental three countries toward civilization.
한국어
본고는 일본의 대표적인 지식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의 <시사신보(時事新報)>(1882-1936)를 중심으로 갑신정변 전후로 한 김옥균의 행적을 살펴봄으로 써, 당시 일본인이 인식한 김옥균의 위상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는 신문이란 매 스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재현된 김옥균과 그 당시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세가 일본 민중에게 어떻게 전달되어, 인식 및 비판해 왔는지를 재검토하는 일이라 하겠다. 즉 후쿠자와가 <시사신보> 논설을 통해 언급된 김옥균의 위상은, 1차적으로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 실패 경과를 보도하여 청나라로부터의 자주독립과 부국 강병을 주장한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를 소개하면서, 2차적으로는 당시 서양문명 의 유입과 제국주의라는 긴박한 국제정세 속에서 조선과 청나라의 유교주의를 비 문명으로 규정 및 이러한 비문명에서 문명세계로 탈아(脫亜)해야 한다고 하며 국민의 통합과 단결을 주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김옥균이 망명 이후 약 10 여 년 동안 오사카 사건이나 오가사와라 섬 유배 등 그의 행적을 보도함으로써 청 나라와 조선에 있어서 김옥균의 반향을 환기시키거나 혹은 와다 엔지로나 스나가 하지메와 같은 수많은 일본 청년지사들에게 선망과 존경의 대상으로 반향을 불러 일으키는 동시에, 한편으로 청나라와 조선에 대한 소극적인 일본정부를 비판하는 자세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나아가 1894년 3월 김옥균이 상하이에서 홍종우에게 암살된 소식과 일본 정치계 인사들 및 국민들의 애도를 표하는 보도는 김옥균의 위상은 물론이고 그의 사상과 인간적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김옥 균 유해 처우 방식을 둘러싼 청나라와 조선의 불합리성을 비난하며, 당시 일본정 부의 청나라와 조선에 대한 침략확장을 위한 국민 여론을 형성시키고자 하는 사상 적,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고자 한 면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시사신보>에 나타난 김옥균, 다시 말해 후쿠자와 유키치가 바 라본 김옥균은, 비록 후쿠자와가 김옥균를 통해서 당시 청나라와 조선 여론에 대 한 국민들의 관심과 이목을 집중 및 통일시켜, 마침내 일본정부가 1894년 7월 청일 전쟁을 선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하더라도, 조선의 개화사상가이면서도 동시에 김옥균이 주장했던 조선, 일본, 중국이 힘을 합해 서구 열강을 물리치자는 삼화주 의(三和主義)는 동양 삼국을 문명 세계로 이끌고자 한 근대 사상가라는 점에서 후 쿠자와와 동지적 유대감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러한 김옥균의 위상과 시대인식은 당시 일본 대중들에게도 전달되어 인식되었다고 하겠다.
목차
Ⅰ. 서론
Ⅱ. 갑신정변을 둘러싼 조선과 청에 대한 인식
Ⅲ. 망명 후, 김옥균의 행적과 그 반향
Ⅳ. 일본인에 있어서 김옥균의 위상
Ⅴ. 결론
참고문헌